나는 〈맞불〉 정성진 교수의 칼럼을 애독할 뿐 아니라, 그의 저서나 논문도 빠짐없이 읽으려 노력하는 일종의 팬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상당수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자본주의의 적당한 개량에서 찾는 상황에서, 〈맞불〉 58호에 실린 정성진 교수의 개량주의적 대안 비판 칼럼은 유익했다.
다만 정성진 교수는 개량주의적 대안 비판에 집중하느라, 그런 주장이 담고 있는 긍정성을 사주는 데 지나치게 인색했던 것 같다.
토빈세나 투기 자본 규제 요구가 지지받는 것은 노동자들의 현실의 필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투기 자본의 인수 합병과 ‘먹튀’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었다. 오리온전기, 만도기계, 하나로텔레콤, 하이닉스매그나칩, 기륭전자 등에서 노동자들은 투기 자본의 수익을 위해 대량 해고되거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렸다.
투기 자본과 싸우면서 노동자들은 투기 자본 횡포가 자본 자체의 속성에서 비롯함을 깨닫기도 한다. 정성진 교수가 “파생금융상품 문제를 진정으로 제기할 경우 … 자본주의의 문제 그 자체와 정면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뜻일 것이다.
나는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토빈세나 투기 자본 규제 요구를 내건 투쟁을 지지하면서 혁명적 대안을 설득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투기 자본 통제 요구의 의의를 과장해선 안 되지만, 그 자체로 일정한 긍정성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투기 자본 통제와 토빈세 도입은 이윤 논리가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의해 시장이 통제될 수 있음을 보여 줄 수 있다.
투기 자본 규제와 토빈세 도입 요구 투쟁은 자본 논리에 대한 도전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더 심오한 투쟁의 고리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