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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북한을 악마로 만들어 왔는가

[이 글은 ‘다함께’ 운영위원이며 <맞불> 편집자인 김하영 동지가 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신문인 <소셜리스트 워커> 2073호에 기고한 글(‘North Korea: a divided history’)이다. 한반도 긴장 구조와 미국의 대북한 적대 정책이 냉전과 냉전 해체를 거치며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돼 왔는지 설명한 이 글은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극동의 가난한 나라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부시 정부의 모순을 여러 모로 드러내고 있다. 부시 정부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지난해 10월에 핵실험까지 실시한 북한에는 양보한 반면,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가 없다는 이란은 계속 위협하고 있다. 2003년에도 부시는 북한이 아니라, 대량살상무기가 없는 이라크를 공격했다.

사실, 북한의 핵무기는 북한 나름으로 이라크 전쟁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북한 지도자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수 있었던 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북한 핵무기는 이라크 전쟁 전에는 의혹이었지만 후에는 현실이 됐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세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북한이 1994년에 맺은 제네바 합의에 따라 2002년까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있었다. 북한이 이를 해제하고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부시 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키고, 핵무기를 사용해 북한을 선제 공격할 수 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대북 적대는 좀더 역사가 길다. 한국은 35년 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맛볼 겨를도 없이 분단됐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미·소 양대 제국주의 국가들은 온갖 저항을 짓밟으며 자국에 충성하는 정권을 각각 한반도 남북에 수립했다.

1950년 여름, 스탈린의 재가를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여기에 곧 미국과 중국이 개입하면서 한반도는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리전의 전쟁터가 됐다. 2백만∼3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이 이 전쟁에서 죽었다. 주로 민간인이었다. 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미국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건물이 남아 있지 않게 된 뒤에야 폭격을 멈췄다. 태평양전쟁 동안 여러 나라들에 투하된 폭탄과 맞먹는 양이 북한에 투하됐다. 전쟁이 계속된 3년 동안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여러 차례 고려했다. 전쟁이 한창인 1951년에는 평양에 대한 모의 핵폭격 비행훈련까지 실시했다. 평양은 제2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될 뻔했다.

참혹했던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 때문에 미국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증오는 깊었고, 이것은 그 뒤 오랫동안 북한 정권을 지탱시켜 준 비결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정전협정을 위반하며 남한에 핵무기를 들여왔고, 많을 때는 2백여 기나 배치됐다. 1991년 미국은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했다고 발표했지만, 그 뒤 지금까지도 한반도에서 핵전쟁 연습은 계속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 직후 “북한은 앞으로 1백 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호언했지만, 전후에 북한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경제를 재건했다.

소련은 동유럽의 대다수 나라들을 그랬던 것처럼 북한도 소련의 경제적 필요에 편입시키기를 바랐다. 하지만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 출신의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스탈린주의 모델을 충실히 따라 중공업 중심의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인민의 소비는 철저히 희생돼야 했다. 소련처럼, 북한도 미사일은 잘 만들게 됐지만 옷이나 신발은 형편없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이런 조건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북한 당국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 대중”이라고 강조했는데, 그것은 인민 대중이 경제 건설에 적극 나서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었다. 스타하노프식 생산성 증대 운동에는 일본이나 미국에 맞서는 군사작전을 연상시키는 이름이 붙여졌다.

북한이 소련으로부터의 독자 노선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존재 덕분이었다. 북한은 1960년대 이후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이용해, 필요에 따라 양국과 협력 또는 거리 두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주체사상은 1980년대 남한의 학생 운동가들이 그것에 매료됐던 것과는 달리 사회주의적이지도 반제국주의적이지도 않았다.

높은 착취율을 유지하려면 강도 높은 억압이 필요했다. 김일성 정권에 대한 반대는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반대파는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숙청·강제수용소·보안경찰이 정권을 떠받쳤다. 그동안 논란이 돼 온 공개 처형과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는 몇 년 전 북한 당국도 인정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노동조합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김일성은 단체협상이 “자본주의 사회의 낡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선언했다. 한국전쟁 시기로부터 유래된 엄격한 노동규율이 상당 기간 유지됐다. 동성애는 금지됐고, 장애인들은 수도인 평양에서 모두 쫓겨났다.

1972년에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지만, 북한은 사회주의와는 닮은 데가 조금치도 없었다. 북한은 미국의 비호를 받는 잔혹한 군사독재 하의 남한 체제만큼이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였다.

1970년대까지 북한 경제는 남한을 계속 앞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즈음부터 “자력갱생” 모델은 이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0년대 북한 경제는 소련 경제와 거의 같은 하락 곡선을 그리며 추락해 갔다.

1984년에 착공했다가 그 뒤 경제적 어려움으로 완공하지 못해 콘크리트 흉물이 된 105층짜리 류경호텔은 마치 한때 번영을 꿈꿨지만 지금은 몰락한 북한의 한탄스러운 처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그렇지 않아도 허약해진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 에너지 부족으로 공장 가동률이 절반 이상 뚝 떨어졌다. 1990년대 중반 홍수 피해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최악의 기아 사태가 벌어져 인구의 5∼10퍼센트(1백만∼2백만 명)가 굶어죽었다. 탈북 행렬이 이어져 재중국 탈북자의 수는 한때 10만∼30만 명에 이르렀다.

식량난과 아동 영양실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깡마른 어린이가 탄산음료수 병을 이용해 링거 주사를 맞는 모습은 서방 언론에도 종종 소개되는 장면이다. 같은 인종인 남북한 청소년의 신장 차이는 지금 무려 15센티미터 가량 된다.

“이윤을 기준으로 국가 경제 체제를 개혁”한다는 북한 정부의 2002년 7·1 조처 이후 민중의 삶은 더 나빠졌다. 무상으로 공급되던 서비스에 사용료가 붙게 됐고, 교육과 탁아 보조금이 폐지됐고, 성과급도 철저히 도입됐다. 임금은 약 8∼20배 오른 반면 쌀값은 5백 배 이상 폭등한 살인적 인플레로 특히 도시 노동자들의 고통이 컸다.

종종 북한은 망해가면서도 고집스럽게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수십 년 숙적인 남한이 소련·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자 북한은 미국·일본과 외교 관계 맺기를 원해 왔다. WTO나 아시아개발은행에도 가입하고 싶어한다. 경제 재건을 위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92년에 “미국에 가 낚시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뒤를 이은 아들 김정일도 2002년, 당시 일본 총리 고이즈미를 통해 “부시 대통령과 밤새 목이 쉬도록 노래 부르고 춤추고 싶다”는 말을 전달했다. 북한은 한반도에 미군이 남아 있는 것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표명해 왔다.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군대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 모든 제안을 번번이 뿌리친 쪽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북일 관계 개선에 훼방까지 놓아 왔다. 2002년, 당시 일본 총리 고이즈미가 평양을 방문하자 부시 정부는 고농축 우라늄 의혹을 제기해 제2의 북핵 위기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북한에 대한 접근 금지 신호와도 같았는데, 1991년에도 이와 흡사한 일이 있었다. 또, 남북 관계가 북미 관계를 앞지르기라도 하면 미국은 못마땅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북한을 악마로 만들어 온 것은 냉전 해체 이후 동북아 질서에 대처하는 한 수단이었다. 1998년 여름 미국 의회에 제출된 럼스펠드 위원회의 보고서는 북한을 ‘깡패’로 규정하고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는 효과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 보고서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을 위한 추가예산을 확보했다.

누가 보기에도 미사일방어 체제는 날로 영향력을 증대하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지만, 미국은 북한을 핑계로 미사일방어 체제를 구축하고 여기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큰 성과를 거뒀다. 일본 정부는 국민에게 북한에 대한 반감을 부추겨 재무장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남한도 미사일방어 체제에 사실상 참여하고 있고, 한미동맹 재편에도 합의했다. 그럼에도 남한이 대북 정책에서 미국과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을 악마로 만들어 온 반면, 남한 자본가들의 상당수는 냉전 시절에는 접근이 금지됐던 북한이 새로운 투자처가 되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북한 개성공단의 싼 노동력은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개성공단 노동자들의 임금은 57달러인데, 남한에서 같은 수준의 노동자를 고용하려면 2천 달러는 줘야 한다.

그들에게 북한은 냉전 시절에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섬처럼 고립됐던 남한을 중국·러시아·유럽과 연결시켜주는 벨트다. 이미 남한의 수출 대상 1위 국가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고, 얼마 전에 미국은 2위 자리마저 유럽연합에 내줬다.

1990년대 북한의 위기를 지켜본 남한 사람들은 이제 더는 북한을 큰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선제공격을 우려한다. 어떤 점에서 남한 지배자들은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와 그로 인한 난민 물결 등의 혼란을 핵 못지 않은 위협으로 여긴다.

부시 정부는 집권 이후 사실, 일관된 대북 정책을 추진한 적이 없었다. 부시 정부는 이 문제에서 늘 분열돼 있었다. 부시 집권 내내 미국이 취한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북한을 6자회담(미국, 북한, 남한, 일본, 중국, 러시아) 테이블에 불러 앉혀놓고 협상은 진척시키지 않은 채 계속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미국이 계속 무시할 때마다 북한은 충격요법을 사용하곤 했다. 북한의 군사력은 미국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미국에 충격을 줄 만큼은 된다. 1990년대 북한 경제가 붕괴 지경에 이른 뒤에도 김정일은 (“선군 정치”라는 이름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우선순위를 둬 왔다. 2005년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는데도 미국이 애써 사태의 의미를 축소하자, 북한은 2006년 7월 미사일 실험에 이어 10월 핵실험을 단행했다.

자신이 “악의 축”이라고 부른 국가가 핵실험을 했는데도 미국은 군사적 수단을 채택하지 못했다. 이라크 수렁에 깊이 빠진 부시 정부는 중동 전선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엔을 동원한 경제 제재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북 원유 공급과 교역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중국이 제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남한·일본·대만 등지로의 핵 도미노 위험을 방치하느니 차라리 북한과의 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악행을 보상하지 않겠다”던 부시는 중유와 관계개선 약속 등의 선물 보따리를 북한에 쥐어주고 다시금 서둘러 북한 핵을 동결시켰다. 5년을 낭비한 끝에 2002년으로 회귀한 셈이었지만, 북한의 손에 핵무기가 있다는 것은 큰 차이점으로 남았다.

부시는 지금 북한이 핵 프로그램과 핵무기를 폐기하면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 핵이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의 산물이므로 부시가 문제 해결에 진지하다면 대북 적대 정책을 먼저 철회해야 할 텐데 말이다. 북한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원하지만 미국의 말만 믿고 핵을 폐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은 이미 여러 차례 약속을 어긴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부시는 중동 전선에 전념해야 하는 동안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북 협상에서 양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북한-시리아 핵 커넥션 의혹이 북미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부시가 54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한국전쟁 종전을 선언하고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해도 그것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날 전쟁의 악몽은 50여 년 전에 시작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최근 부상하고 있는 미일동맹과 중국의 갈등이 중장기적으로 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고 여기에 남한이 연루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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