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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볼리비아 항쟁에서 배워야 할 교훈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볼리비아는 신자유주의 모델이 될 법한 나라였다. 민영화, 복지 예산 삭감, 노동 유연화 등 이명박이 도입하려는 것과 같은 정책들을 1985년에 살인적 물가 상승을 억제한다는 명목으로 한꺼번에 도입했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민영화 과정에서 대량 해고가 발생했다. 토지는 대지주의 수중으로 집중됐고 농민은 자기 토지를 잃고 떠돌기 시작했다. 대중의 생활수준은 급격하게 하락했다. 옛 독재 정부 출신 대통령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이런 ‘충격 요법’은 경제를 살리지 못했고 대중의 분노만 나날이 쌓여 갔다. 민중이 야만적 정책에 맞서 싸울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것은 새 천년에 들어서였다. 이를 처음 보여 준 것이 2000년 코차밤바의 ‘물 전쟁’이었다.

볼리비아 정부가 코차밤바 주(州)의 물 공급을 벡텔 등 다국적기업에 넘긴 결과, 최저임금이 약 6만 원인 나라에서 가구당 월평균 수도요금이 1만 5천 원에 달하게 됐다.

분노한 지역 주민들, 다양한 시민단체와 조직 노동자 들이 힘을 모았다. 그들은 ‘물과 삶을 방어하기 위한 연합’을 결성했고, 공개 회의에서 투쟁 과제와 투쟁 방식을 민주적으로 논의하고 결정 사항을 함께 이행했다. 급진화한 주민 대중은 수도요금 인상 반대를 넘어 물자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요구했다. 그들은 주요 도로를 점거했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정부는 민영화 결정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코차밤바 투쟁은 2003년과 2005년에 반복될 투쟁 패턴 — 거리 시위와 조직 노동자 투쟁의 결합, 요구의 급진화, 투쟁의 목표와 방향을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기구의 등장 — 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민중의회

2003년 우파 정부를 몰아내는 투쟁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직접적 원인은 볼리비아 천연가스를 미국과 멕시코에 수출한다는 정부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 석유 다국적기업들이 개입했기 때문에 사실상 천연자원 추가 민영화의 전초전이나 다름없었다. 대중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돈이 없어 가스를 사용하지도 못하는데 가스를 수출한단다. 가스를 수출한 돈은 다국적기업이 가져간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가스 수출인가?” 대중은 거리로 나섰다.

당시 대통령 산체스 드 로사다는 이 정당한 의문에 잔인한 폭력 진압으로 답했다. 2003년 9월 19일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3명이 사망했다.

이제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고 코차밤바 주(州)에서 ‘물 전쟁’에서 일어났던 일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수도 라파스에서는 ‘민중의회’가 열렸다. 각 지역에서 선출된 대의원 수천 명이 모여 공동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결정된 사항을 라디오를 통해 알리고 자기 지역에 돌아가 투쟁을 조직했다.

시민들과 농민단체는 도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화물운송 노동자들도 파업에 들어가 물류를 마비시켰다. 볼리비아 전략 산업 중 하나인 광업에서는 전투적인 볼리비아노총(COB)이 총파업을 선언했다. 모든 광물 채굴이 즉각 중단됐다.

천연가스 수출 반대가 투쟁의 초점이었지만, 사람들은 투쟁 속에서 급진화했고 다양한 요구를 내놓았다. 민중의회는 투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볼리비아를 공정한 사회로 만드는 데 필요한 공통 요구를 작성했다.

물·가스·석유 등 천연자원 국유화, 미주자유무역협정(FTAA) 반대, 민주적 권리 확충을 위한 제헌의회 소집 등이 공통 요구가 됐다. 사람들은 이것을 ‘10월 의제’라고 불렀고, 그 뒤로 볼리비아 민중 항쟁이 성취해야 할 목표가 됐다.

이것을 쟁취하려면 먼저 1980년대 시장주의 ‘충격 요법’을 도입한 장본인인 로사다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했다. 대통령 사퇴는 민중의회의 공식 목표가 됐고, ‘10월 의제’와 함께 운동의 힘을 결집시키는 초점이 됐다.

반격

민중은 로사다를 몰아냈다. 물론 초기에는 부통령 카를로스 메사가 살아남았고 헌법에 따라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메사가 갑자기 대통령과 거리를 뒀고, 헌법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중간계급 지식인과 일부 운동 지도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민중의회는 부패·착취·억압이 없는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대안 사회의 모습을 힐끗 보여 줬지만, 민중은 한 번 더 구체제 인물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카를로스 메사는 민영화 중단, 재국유화, 복지 확대를 약속했고, 농민에게는 토지 분배를 약속했다. 메사는 “만약 내가 여러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나를 쫓아내도 좋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거짓말과 배신뿐이었다. 메사는 약속을 모두 어겼다. 국내외 기업인과 대지주 들의 이익에 봉사해 온 인물이 이제 와서 개과천선할 리 없었다. 오히려 천연자원과 부를 독점해 온 산타크루스의 우파들과 손을 잡고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압도 다수 볼리비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 순간에 사람들이 다시 뭉쳐서 반격하지 않았다면, 다시 한 번 공식 정치의 영역을 뛰어넘어 시위와 파업으로 정부를 꺼꾸러뜨리지 않았다면, 옛 독재자가 폭압적으로 시장주의 정책을 추진했던 1980년대의 비극이 되풀이됐을 것이다.

2005년 5~6월 투쟁은 볼리비아 민중 항쟁의 정점이었다. 민중의회가 훨씬 더 큰 규모로 등장했다. 6월 8일, 항쟁의 심장부인 엘알토에서 최초로 전국적 민중의회가 열렸다. 당시 민중의회는 사실상 대안 정부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 투쟁이 없는 곳이 없었고, 기존 국가 기구들은 무기력해졌다. 평범한 사병과 말단 경찰 들은 자기 부모형제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다. 결국 메사는 물러나야 했다.

아쉽게도 민중의회는 새로운 사회의 대안 정부로 발전하지 못했다. 대신에 민중은 진보 대통령 후보인 에보 모랄레스에게 기회를 줬다.

모랄레스 당선 이후 볼리비아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모랄레스 정부는 ‘10월 의제’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천연자원을 재국유화했고, 거기서 나온 자금을 복지 확충에 썼다. 무토지 농민을 위한 토지 개혁을 시작했고, 모든 농민에게 노령연금 지급을 약속했다. 최근 뉴스를 보면 가정부들에게도 연금 혜택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이런 조처들을 도입하는 것을 보면, 돈이 없어 복지 확충을 못한다고 투덜거리는 한국 정부와 기업주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뻔뻔한 거짓말쟁이들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나 볼리비아에는 여전히 이런 변화에 반대하고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세력들이 남아 있다. 고위 국가 관료·기업주·대지주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지금 모랄레스 정부를 좌초시키고, ‘10월 의제’가 상징하는 진보적 정책들을 무력화하고,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 한다.

돌이켜보면, 2003년 10월과 2005년 6월 평범한 노동자와 서민들을 대변하는 기구인 민중의회가 구성되고 잠깐 동안 노동자·서민이 사실상 사회의 주인이 됐을 때, 즉 그들의 힘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런 국가관료·기업주·대지주의 권력 기반을 해체했더라면 ‘10월 의제’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회는 오늘 서울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민영화·대운하·언론 통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시장주의에 반대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시장주의 반대 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 ‘대안세계화운동’이고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가 가장 인기 있는 구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볼리비아 민중 항쟁은 그 ‘다른 세계’를 위한 투쟁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 가장 최근 사례다. 지금 촛불을 들고 있는 우리 모두 볼리비아 투쟁에서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