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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전환점

역사에서 인간이 만든 달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수십, 수백 년 세월을 기록하기 위해 연대기순으로 사건들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따금 어떤 사건이 특별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1999년 12월 시애틀의 반WTO 투쟁이 그랬다. 이 나라에서는 12월 7일과 14일 반미 촛불 시위가 그런 경우다.

이 시위는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지난해 9‍·‍11 이후 국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반미‍·‍반전 운동에 한국도 가세했다. 우리는 새로운 운동의 등장을 보고 있다.

두 시위는 남한 반미 투쟁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였다. 12월 7일 시위에는 전국에서 5만여 명이 참가했다. 14일에는 서울에서만 5~6만 명이 참가했다. 시위대가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하면서 시위대는 더욱 늘었다. 전국적에서 대략 3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두 여중생을 장갑차로 깔아뭉개 죽인 미군에 무죄 평결을 내린 것에 항의했다. 불평등한 SOFA 개정을 요구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운동은 ‘반미’ 운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이 운동은 미군의 두 여중생 살해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했다. 운동의 즉각적 요구도 주되게 이 점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대중적 반미 시위의 위대한 승리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올해 각종 여론 조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들이 반미 시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중적 저항이 분출하자 ‘반미’는 운동에 겁을 집어 먹은 언론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용어가 됐다. 아마 그들은 다른 적절한 표현이 있었다면 ‘반미’라는 선동적 단어를 피했을 것이다. 냉전 시절에 정부는 ‘반미’를 ‘용공’, ‘친북’이라고 비난했다. 권력자들의 사전에서는 다른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반미’는 시위대 스스로 사용하는 용어였다.

대규모 반미 시위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이 운동은 1990년대 중엽부터 고양되기 시작한 계급 투쟁의 일부다. 노동자 운동이 계급 투쟁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1996년 연말에서 1997년 1월 중순까지 이어진 ‘노동법’ 파업이 분수령이었다. 대중 파업의 영향으로 34년 일당 독재가 막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한 1997년 IMF 경제 공황은 파업과 대중 시위 못지 않게 노동 계급의 의식을 바꿔 놓았다. 노동 계급은 IMF 경제 공황을 통해 미국의 경제적 패권주의를 경험했다. 대중의 삶을 망가뜨리는 신자유주의와 경제 세계화를 미국이 강요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미국은 한국의 우방’이라는 전통적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PRC)가 발표한 ‘2002 세계인의 생각’ 보고서를 보면, 비이슬람권 국가 가운데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는 나라는 한국과 혹독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 두 나라였다.

IMF 경제 공황이 미국의 경제적 패권주의를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면, 조지 W 부시의 대북 강경 몰이는 대중이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를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 정부는 북한을 ‘테러 지원국’에 포함시킨 데다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악의 축’ 국가들에 선제 핵 공격을 하겠다는 태세다. “미국이 고압적이고 둔감하며, 특히 북한과 관련한 문제에서 그렇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반미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뉴욕 타임스〉 12월 8일치).

미국의 군사적 패권 야욕 때문에 한반도는 세계의 화약고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러다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하다. 상당수 한국인들이 미국의 전쟁 몰이를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PRC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응답자의 72퍼센트가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했다. 73퍼센트는 미국의 외교 정책이 일방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반미 시위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 운동의 일부다. 실제 반미 시위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주장들이 많았다. 12월 7일 시위에서 촛불 시위 최초 제안자는 “‘세계 시민’인 우리는 미국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이라크에서 효순이, 미선이 같은 아이들이 1백만 명씩 죽어 가는 것을 슬퍼해야 한다”고 말해 커다란 박수를 받았다. 14일 시위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패권주의에 대한 대중적 자각 때문에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분노가 3만 7천 명의 주한 미군 철수를 요구해 온 좌파 학생들의 범주를 넘어 확산되고 있다.”(〈뉴욕타임스〉 12월 8일치.)

남한의 반미 운동은 종종 주한 미군을 반대하는 형태를 취한다. 역사적으로 특수한 이 나라의 조건, 특히 냉전 시절에 미국과 소련이 강요한 분단과 전쟁 경험 때문이다. 게다가 주한 미군은 오만하게 ‘점령군’ 행세를 하고 있다.

“미국은 서울에서 공공연히 자신들의 정치적 비중을 과시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시내 중심가의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한 거대한 부지에 머물고 있어 한국인들을 자극하고 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여러 유럽인들도 미국인들의 오만한 태도로 인해 한국을 ‘미국의 나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 12월 3일치.)

미국, 김대중, 노동 계급

최근의 반미 시위는 대중의 심오한 정치적 각성만큼이나 새로운 특징들을 보여 줬다. 다른 운동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대중의 자생성이다. 시위에는 중고등학생, 대학생, 안티조선 활동가, 종교인, 아기를 등에 업은 젊은 부부, 연인, 좌파 활동가, 노동자 들이 참가했다. 시위대의 압도 다수는 젊은이들이었다.

12월 7일 시위 때도 대중의 자생성을 보여 주는 사건이 있었다. 사회자가 “14일 집회가 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자”고 제안하자 시위 참가자들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미 대사관을 향해 행진했다. 경찰도 시위대의 규모와 기세에 눌려 행진을 막을 수 없었다.

운동이 이토록 거대하게 발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놀라운 성과 때문에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 여섯 달 가까이 정부의 혹독한 탄압에 맞서 운동을 건설해 온 좌파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정치적 차이를 둘러싼 논쟁을 기피하는 경향도 있는 듯하다. 친미 우파 정당인 한나라당이 전국비상시국회의에 참가했는데도 한나라당 비판을 삼간 것이 그런 경우다.

반미 시위 현장의 지배적 분위기는 미국에 대한 즉각적 분노였다. 당연하게도, 시위 참가자들의 의식은 매우 모순돼 있다. ‘대한민국’을 외치거나 태극기를 몸에 두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어떤 이들은 운동이 SOFA 개정이나 부시 사과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주한 미군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통해 처음으로 정치 활동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데올로기가 섞여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좌파는 이런 사람들을 겸손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운동의 전진을 위한 논쟁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논쟁은 이렇다 : 미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김대중의 친미 노선에 대한 비판을 삼가야 하는가? 노동 계급은 단지 국민의 일부인가 아니면 운동의 성패를 가를 핵심 세력인가?

반미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투쟁의 표적을 미국에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반미 시위대의 행진을 가로막는 것은 한국 경찰이다. 김대중은 ‘반미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가 친미주의로 일관하는 것은 한국 지배 계급이 미군 주둔에 밀접한 이해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미군이 없었다면 우리[한국 지배 계급]가 오늘날 살아남아 이런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김대중 비판에 인색하거나 기피해서는 안 된다. 반미 운동은 국내 지배 계급에 맞서는 투쟁과 결합돼야 한다. 계급 협력적(민족 대단결) 방식으로는 미국에 일관되게 맞설 수 없다.

이것은 반미 시위가 계급 투쟁적 방식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러면 조직 노동 계급의 동원이 필수적이다. 노동 계급 없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운동을 건설하기 어렵다. 그런 운동은 로켓트처럼 솟아 올랐다 나무토막처럼 떨어질 수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지금의 운동을 1987년 6월 항쟁에 비유한다. 그러나 6월 항쟁은 운동 초기부터 노동자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다. 일부 지역(부산, 성남 등)에서는 처음부터 노동자들이 주도력을 발휘했다. ‘제2의 6월 항쟁’이 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그리 되면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결합 가능성이 더한층 높아질 것이다. 노동자들이 반미 투쟁에 적극 동참한다면 장차 벌어질 경제 투쟁(3대 악법 철폐 투쟁)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거리의 활력은 경제적 조건 개선 투쟁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은 7~9월 노동자 대파업으로 이어졌다.

운동과 정당

이런 주장들은 불가피하게 조직된 정치 조직이 펼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에 그렇지만, 특히 세계 초강대국 미국에 저항하는 운동은 하나의 슬로건이나 불안정한 연합체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효과적인 운동을 건설하려면 지도력, 전략, 조직 중핵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상당수 시위 참가자들은 정당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물론 한나라당 같은 보수 정당들이 운동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순전히 선거를 의식해 운동을 지지하는 척하는 보수 정당들이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조직(정당) 문제 그 자체를 회피하는 것은 잘못됐다. 이것은 문제를 다른 형태로 되풀이할 뿐이다. 서구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봤듯이, 반자본주의 정서의 수혜자는 처음에 우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었다. 1997년 영국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반보수당 분위기 덕분에 승리했다. 1995년 12월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의 논리는 조스팽이 이끄는 사회당의 정책과는 달랐지만 파업의 정치적 수혜자는 사회당이었다.

운동 내 활동가들은 정치적 지도력을 창출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중 운동이 올바른 정치적 표현을 채택할 수 있다. 모든 정당을 거부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정치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미 운동에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데올로기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운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전술을 채택해야 한다. 이것은 첨예한 정치적 논쟁을 수반할 것이다. 정치를 기각하는 운동주의는 미국과 보수 정당들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이론과 전술을 제시할 수 없다.

전망

12월 10일에 부시는 미사일을 싣고 항해하던 북한 선박을 나포했다. 14일 대규모 반미 시위와 19일 대선을 겨냥한 것이었다. 최일붕 동지가 이 잡지의 다른 글에서 지적했듯이, 북한의 ‘위협’이 현존한다는 점을 한국인들에게 상기시켜 주한 미군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우파를 돕는 한편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좌파를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14일에 대규모 시위가 예정대로 벌어짐으로써 반미 운동은 첫 고비를 넘긴 듯하다. 그러나 미국과 우파들은 다시 반격의 기회를 노릴 것이다. 미국의 반격은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이것은, 당장은 아닐지라도, 앞으로 더욱 격렬한 충돌을 낳을 것이다.

새로운 운동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위 참가자들은 “우리는 냄비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31일 시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롭고 거대하고 다채로운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