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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토니 클리프ㆍ도니 글룩스타인, 책갈피:
영국 노동당 개혁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부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토니 클리프와 도니 글룩스타인은 20세기 전체에 걸쳐 영국의 좌파와 노동계급 운동에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친 노동당에 대한 신화를 칼로 버터 자르듯이 해부한다.

첫째,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과거에 대한 신화. 클리프와 글룩스타인은 “노동당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영국노동당 1백 년의 역사에는 여러 개의 ‘노동당’이 있다”거나 “혁명주의 분파들의 무능과 오류” 때문에 “개혁주의로 치닫은” 것(이재영, 〈레디앙〉 9월 24일)이 아니라 노동당은 시종일관 노동계급의 염원을 현존 사회 구조 안에서 충족시키려는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이런 시도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는 진정한 사회주의와 아무 관련 없었다. 오히려 종교, 자유주의 그리고 페이비언주의의 혼란스러운 혼합물이었다. 노동당의 창립자 키어 하디는 단지 자유당의 공천을 받지 못해 노동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나는 평생토록 자유당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키어 하디를 예찬하는 주대환이 최근에 노동자 독자 정당 노선을 폐기하고 민주당 ‘개혁파’들과의 연대를 표방한 것은 우연이 아닐 듯하다.

주대환이 “남은 인생을” 다 바쳐 만들고 싶다는 페이비언주의는 철두철미 엘리트주의적 부르주아 전망을 갖고 있었다. 페이비언협회의 핵심 인물 비어트리스 웨브가 기술했듯이, 페이비언주의는 자유주의에서 유래했으며 제국주의, 인종차별주의, 국가 숭배, “천박하고 교양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경멸에 찌들어 있었다.

둘째, 노동당이 노동계급과 노동조합의 정당이라는 신화. 많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노동당에 투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당이 노동조합과 노동계급의 투쟁을 대변·지도·고무하거나 그 투쟁 속에서 적극적 구실을 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클리프와 글룩스타인은 말한다. 노동당은 계급투쟁의 고양(1888년 이후 등장한 신노조 운동)이 아니라 패배의 산물이었다.

노동당은 현장 조합원들이 아니라,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에 의해 건설됐다. 노동당은 언제나 계급투쟁에 대해 “정치 행동”(노동당에 투표하기)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대립적 자세를 취했다. 이때 “정치 행동”은 직간접적으로 계급투쟁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셋째, 노동당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수 없는 개혁주의 정당이지만, 그래도 보수당보다는 낫다는 믿음. 그러나 클리프와 글룩스타인은 노동당의 개혁주의가 반드시 개혁을 제공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1백 년 역사 동안 열 번의 노동당 정부가 등장했다. 그 중 애틀리 정부(1945~51년)만이 실질적 개혁을 제공했다. 나머지 노동당 정부들은 자신들을 지지한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노동당은 노조 지도자들과의 연계와 노동자들의 충성심을 이용해 보수당 정부보다 종종 더 효과적으로, 덜 저항을 받으며 노동자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넷째, 좌파가 노동당에서 헤게모니를 쥘 수 있다는 신화. 노동당 좌파는 자신들이 당을 혁명적으로(또는 왼쪽으로) 이끌 수 있다는 희망으로 노동당에 남아 있었다(민주노동당 분당 이전에 장석준[진보신당 정책팀장]이나 ‘해방연대’의 견해이기도 했다). 이런 희망은 늘 실망으로 끝났다.

노동당 좌파의 정치는 우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개혁주의였다 ─ 의회주의, 선거주의, 민족주의, 계급협조주의. 그래서 결정적 시기에 좌파는 언제나 좀더 일관된 개혁주의 논리의 대변자인 우파에 굴복했다.

조직적으로 좌파는 지구당에 기반을 뒀다. 지구당은 의원단과 달리 선거의 필요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았고 노조 전임자들에 비해 자본과의 관계에 덜 속박받았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지구당은 노동당에서 가장 무기력한 집단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냉엄한 사실주의 비판

클리프와 글룩스타인의 노동당 비판은 부패 추문이나 내부 정보가 아니라 노동당 정치 기록에 대한 상세하고 정직한 조사에 근거해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거짓말’, ‘속임수’, ‘배신’과 같은 환원적, 주관적, 정파적 선악법을 남발하는”(이재영) 식으로 노동당 폭로에만 주력했다고 보는 것은 완전한 오독이자 곡해다. 그렇기는커녕,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사용해 “영국 노동당이 왜 개혁주의가 됐는지, 그 지도자들이 왜 대중을 배신했는지, 왜 배신자들이 더 많은 대중 지지를 얻어 당을 장악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제시한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한 당의 역사를 쓰는 것은 특정 각도에서 계급투쟁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리프와 글룩스타인은 시종일관 계급투쟁의 시각을 견지한다. 그들의 출발점은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의 두 근본적 계급 간에 벌어지는 투쟁에서 노동당이 한 객관적 구실이었다.

저자들은 노동당이 근본적 모순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 노동자 정당”. 노동당은 부르주아 이해관계와 부르주아 사상을 대변한다. 그러나 노동당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통합할 사상을 채택하므로 노동계급 내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노동당 이데올로기에서 자본의 이익은 계급에 우선한다고 여겨지는 ‘국익’으로 포장된다. 이런 식으로 노동당은 국민을 이루는 합법적 구성 요소로서 노동계급의 요구를 표현한다. 그러나 “부분”은 전체에 종속돼야 하므로 노동당은 노동계급의 요구를 무시한다.

이 책의 훌륭한 장점 중 하나는 역사의 시기마다 노동과 자본, 계급과 국민의 경쟁적 압력에 대처하는 노동당의 태도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호황일 때와 위기일 때, 노동당이 집권당일 때와 야당일 때, 노동계급이 후퇴할 때와 공격할 때 그 압력들이 어떻게 상이하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압력들이 노동당의 두 기둥 ─ 당 관료와 노조 관료 ─ 에 상이한 영향을 미쳐 갈등을 일으키지만, 그들 간의 근본적 상호의존 관계는 계속 유지된다는 점도 보여 준다.

이런 이해 덕분에 저자들의 노동당 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빈약한 초좌파주의로 미끄러지지 않는다(한국에서는 ‘노동자의 힘’이나 사회주의노동자연합 같은 급진 좌파들이 흔히 이런 오류를 저지른다). 배신을 거듭했음에도 노동당은 반동적인 당이 아니라 개혁주의 정당이다. 그 당은 일관되게 노동계급을 국가(또는 자본)에 종속시켰지만 노동계급과의 연계는 유지되며, 이것이 보수당(이나 자유당 또는 변종 사회민주당들)과 노동당을 근본에서 구별짓게 한다.

클리프와 굴룩스타인은 노동당의 배신과 실패에 대해 냉엄한 사실주의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노동당의 생명력이 끝났다고 결론내리지 않는다. 저자들은 애틀리 정부 이래 노동당이 심각한 하강 국면에 빠져들었다고 분석한다 ─ 선거 기반, 당원 수, 활동가들, 심지어 매우 온건한 개혁을 실행할 능력 등에서.

그럼에도 노동당은 붕괴 일보직전에 있지 않다. 비록 노동당의 개혁주의는 필연적으로 노동계급의 이익을 희생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계급 다수의 모순된 개혁주의 의식과 계속 공존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더 나은 세계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그런 사회를 건설할 자신감이 없는 한은 노동당의 영향력이 결정적일 것이다.”

저자들은 개혁주의 의식과 노동당의 영향력은 오직 혁명적 의식과 혁명 정당의 영향력에 의해 대체될 때만 결정적으로 분쇄될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대중적 개혁주의는 노동자들에게 환상을 버리라고 호소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 자신의 투쟁 경험을 통해 자신감이 높아져야만 사멸할 것이다.”

이런 자발적 투쟁은 개혁주의 의식의 대거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때 혁명가들의 효과적 개입과 대중투쟁이 결합돼야 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볼셰비키와 코민테른의 공동전선 전술, 영국 공산당의 오류, 1970년대 후반 혁명가들의 반(反)나치동맹 건설 등을 분석한다.

이 책은 노동당과 개혁주의 행위를 지배하는 동력과 법칙에 대한 이론적 해설이다. 사회를 근본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활동가들의 논쟁과 교육에 매우 귀중한 도움을 준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진보신당의 우경화에 고민하는 좌파 개혁주의 활동가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