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위기와 투쟁의 과제:
양보하거나 투쟁을 회피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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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한국 경제에도 먹구름을 드리우자 이명박과 조중동 등이 한목소리로 ‘고통분담’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우려스럽게도 일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정부와 사장들에게 불필요한 양보를 하거나 투쟁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민공노·전교조 지도부는 공노총·교총과 함께 정부의 ‘더 내고 덜 받는’ 공무원 연금 개악에 합의했다. 이들은 “국내외 경제 상황”을 고려해 “고통을 감수했다”고 변명했다.
현대·기아차 노조 지도부는 주간 연속 2교대제를 도입하는 대신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조건을 낮추는 데 합의했다. 다행히 이 합의안은 현장 노동자들의 투표에서 부결됐지만 결국 크게 달라지지 않은 2차 합의안이 다시 통과됐다.
서울지하철 노조 지도부도 사측의 대량 인원감축 계획에 맞선 파업을 갑자기 유보했다. ‘필수유지업무’라는 악법을 지키겠다고 얽매이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한편, 최근 전교조 내부에서는 이명박의 교원평가제를 수용하는 대신, 다른 요구들을 얻어내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주장도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악마는 손가락 하나를 주면 몸 전체를 집어 삼키려 하는 법이다. 공무원 연금 개악에 합의하자마자 공무원 보수 동결을 시도하는 이명박 정부를 봐도 알 수 있다.
고통 ‘전담’
우리는 IMF 때 ‘고통분담’의 쓰디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10년 전에도 지배자들은 고통 ‘분담’을 요구했지만 그 결과는 고통 ‘전담’이었다.
1998년 1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자 김대중 정부는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노동자 해고와 비정규직 확대를 돕는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도입에 동의하라고 민주노총을 압박했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경제 살리기’와 ‘고통분담’ 압력에 밀려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도입에 도장을 찍었다. 분노한 현장 노동자와 대의원 들은 사흘 뒤에 열린 민주노총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압도적으로 이 합의안을 부결시켰지만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파업 조직을 회피했다. 결국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국회를 통과했다.
또, IMF 경제 위기 속에서 많은 작업장의 노조 지도자들이 임금 동결·삭감을 수용하거나, 성과급을 반납하거나, 비정규직 확대를 수용하는 등 ‘양보 교섭’을 통한 ‘회사 살리기’를 선택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노동강도 강화와 임금삭감으로 이중의 고통을 겪었고, 임금을 보충하려고 잔업과 특근, 부업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임금 동결을 양보한 노동자들에게 곧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몰아쳤다.
‘잃어버린 10년’
그러나 IMF 경제 위기를 불러온 재벌과 고위관료 들은 전혀 고통을 분담하지 않았다. 고통은 오로지 노동자·서민의 몫이었다. 그 결과 양극화가 심화했다.
1990~97년까지 0.28 수준이던 지니계수(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며 수치가 높을수록 불평등)가 1998년에 0.32로 급상승했고, 지금도 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공식 빈곤층은 1996년 11.2퍼센트에서 2006년 17.4퍼센트로 늘어났다. 비정규직 노동자 규모도 1999년에 50퍼센트를 넘어서더니 이제 60퍼센트에 육박한다.
김대중 정부는 서민의 허리띠를 졸라서 부자의 배를 불려 주는 방식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
그것도 ‘고용 없는 성장’이었고, 경제가 회복되는 기간에도 저임금 비정규직은 계속 늘었고 양극화는 확대됐다. 더구나 이런 부분적 경제 회복도 끝나고 지금 다시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
IMF 경제 위기 당시에 현장 노동자들의 투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노조 지도자들이 후퇴와 양보를 거듭한 것이 문제였다.
예컨대, 1998년에 현대차 노조 지도부는 사측이 정리해고를 강행하지만 않는다면 임금 등을 양보할 수 있다며 희망퇴직에 도장을 찍어 줬다. 그러자 자신감을 얻은 사측은 5천여 명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현장 노동자들의 분노를 바탕으로 현대차 노조는 36일 동안의 강력한 공장 점거 파업으로 맞섰다. 결국 정리해고 대상을 2백77명으로 크게 줄일 수 있었지만, 당시 현대차 노조 지도부는 식당 여성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를 수용하며 파업을 끝내 버렸다.
경기 후퇴기에는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요구조차 지배자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저들도 양보할 여지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투쟁을 조직하기보다 양보와 타협으로 기운다면 지금의 생활수준조차 지킬 수 없다.
위기에 빠진 재벌·부자와 그들만의 체제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서민이 희생하거나 ‘고통분담’해서는 안 된다. 아래로부터 자신감과 결속력, 전투성을 끌어올려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자·서민의 삶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