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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석 영화칼럼:
악의 진부함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영화는 극장에서 간판을 내린 뒤 악(惡)을 남긴다.

영화를 본 뒤 관객들이 선한 주인공을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경우는 드물다. 〈양들의 침묵〉(1991)을 본 관객들은 여주인공 클라리스보다 인육까지 즐기는 한니발을 더 선명히 기억한다. 또 〈스타워즈〉(1977)를 본 관객들은 루크보다 다스베이더를 더 자주 입에 올린다. 악당이 직접 나오지 않는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영화들에서는 주인공이 처한 모순이나 딜레마가 드라마 기능상 악당 구실을 한다. 그래서 상황 모순과 딜레마, 즉 드라마 내면의 악이 창의적이고 매력적일수록 관객들은 큰 감동과 만족을 느끼게 된다.

영화 속의 악이 매력적이면 영화도 매력적이게 된다. 묘사되는 악의 완성도와 영화의 완성도가 서로 비례하는 셈이다. 기념비적인 영화에는 기념할 만한 악이 나오고 팝콘 무비(팝콘 먹으며 보는 시시한 영화)에는 시시껄렁한 악이 나온다. 그렇기에 영화 창작자의 관점에서 볼 때 성공적인 영화를 만드는 비결은 간단하다. 흥미로운 악을 인상 깊게 창조하면 된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보인다. 우리 주변엔 모순과 악당이 넘치고 흐른다. 그런 현실의 악을 적당히 베끼기만 해도 될 것 같다.

김석기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영화 창작에서 악을 가공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현실의 악은 진부함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독일계 유태인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60년 유태인 학살의 총책임자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혔을 때 ―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해 예루살렘으로 압송했다. ― 아렌트는 흥분에 들떠 취재하러 재판정에 참석했다. 하지만 곧 큰 충격에 빠졌다.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상상한 괴물이나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했다. 단지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사고가 결여된, 진부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런 이가 나치의 사회 시스템이 요구하는 구실과 책임을 군말 없이, 충실히 이행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이로 인해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진부함(The banality of evil)을 논하게 됐다.

우리 주변의 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용산 참사의 책임자였던 김석기는 경찰 내부에서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자기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충실한 경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나 아렌트의 말은 더없이 꼭 들어맞는다. 김석기도 아이히만처럼, 부당한 시스템과 독립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었다. 사고 능력의 진부함이 6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악은 이렇게 태생적으로 진부하다. 그래서 악을 영화에서 매력적으로 가공하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인상 깊은 악당이 등장하는 재미있는 영화가 흔치 않은 현실엔 이런 이유가 큰 몫을 하지 않나 싶다.

우원석 영화감독이 이번 호부터 <레프트21>에 정기적으로 영화 칼럼을 쓴다. 그는 뉴욕에서 영화 공부를 했고 지금 작품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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