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3호를 읽고: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기사를 읽고
〈노동자 연대〉 구독
〈레프트21〉 3호에 실린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에 대해 몇 마디 하려고 한다. 글쓴이는 〈싸구려커피〉와 현재 이땅의 인디를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 정서와 관련해 분석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다른 예술 영역과 마찬가지로 음악 역시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음악은 그 어떠한 예술보다도 ‘즉자적’인 분야다. 다시 말해, 악곡을 구성하는 악기와 보컬 등 소리의 물리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추상적 조각체에 가깝다는 말이다. 사회적, 정치적 관념이나 논쟁을 발생시키는 이론이나 사상, 서사 등이 음악을 이루는 일차적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영화나 문학 등의 장르와는 태생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 글을 쓴 이는 주류 문화평론가들이 답습해 오던 방식, 인상주의식 비평 혹은 사후적 끼워 맞추기에 가깝게 썼다. 이런 식의 분석은 대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결론)를 뒷받침하기 위해 갖가지 질료를 근시안적으로 끌어들일 때 범하게 되는 오류다.
나는 영국의 마틴 스미스나 폴 맥가 등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고 그것에 대한 분석을 종종 내놓는 사람들의 어떠한 글에서도 이런 식의 방식은 본 적이 없다. 예컨대 한 칼럼에서 마틴 스미스는 힙합 뮤지션 커먼(Common)의 음반을 철저히 ‘음향적’으로 평가했고, 영국 록밴드 카이저 칩스(Kaiser Chiefs)를 호평할 땐 해당 음반의 가사만을 두고 분석했다. 한편 폴 맥가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곡조와 편곡 상의 혁신성에서 높이 평가하거나 그의 오페라 가사가 당대의 상황을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이 글은 지나치게 거시적으로, 시종일관 모호하고 억지스러운 ‘사회적’ 분석을 감행하고 있다. 이 글은 10여년 전 크라잉넛의 “말달리자”와 최근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가 마치 “지배 질서 전반에 대한 적대감에 사람들이 열광”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짓눌린 ‘88만원 세대’”의 정서 때문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부분적으로 그러한 점이 있을 수 있고, 글쓴이는 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글을 이렇게 쓴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술, 특히 음악과 같은 즉자적 예술에 대해 쉽사리 사회적 맥락과 결부해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사회주의 신문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객관적 설명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면 좋은 뜻의 리뷰일지언정 일반독자에게 환영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크라잉넛은 “1997년 초 IMF와 함께 ‘혜성처럼’ 등장”했고, 그와 같은 펑크 밴드들이 “상품 논리가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 서민의 분노와 박탈감을 표현”했다는 설명부터가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크라잉넛의 성공 이유가 마치 IMF 시절 서민들의 심정을 잘 반영했기 때문인 것처럼 말하는 이러한 설명은 주류 문화(음악)평론가들의 방식과 닮아 있다. 1996년 발매된 〈Our Nation Vol.1〉가 “말달리자”와 옐로우 키친을 포함해 인디씬의 저변을 확대하고 케이블 채널을 통해 알려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90년대에 꾸준히 수입된 영미권의 상업적 팝/록음악들, 특히 그런지와 펑크록 장르에 대한 국내 대중의 수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기존의 언더그라운드와 다른, ‘새롭고 쉽고 재미있는’ 점이 어필해 주류 언론과 방송을 타고 ‘대중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이 글은 한국의 인디씬이 “소규모 마니아들의 모임에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진 공간으로 발전”한 이유를 모던록, 포크, 힙합 등이 가진 메시지의 발전으로 든다. 역시 지나친 억지다. 국내 인디씬이 지금까지 이렇게 대중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사가 발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음악 자체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이들이 좀더 다양한 국내외 음악을 접할 수 있어서였기도 하다.
“정치 영역에서 지배 질서에 비판적인 새로운 세대를 낳은 역동성이, 대중음악 영역에서도 새로운 발전을 낳았다”는 분석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일단 이 글을 쓴 이는 제목인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의 대상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이 어떤 점에서 “새로운 실험”을 보이고 있는지 분석하지 않는다. “싸구려 커피” 한 곡, 그것도 보통 ‘인디 청자들’에겐 흔해 빠진 루저의 감성으로 다가올 뿐인 이 곡 하나로 “인디의 가능성”을 어떻게 볼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사실 장기하의 음악에 ‘88만원 세대’ 운운하며 그럴듯한 분석을 내려고 시도한 이들은 숱한 주류 언론들과 프레시안에 기고한 어설픈 영화평론가의 글([창비주간논평] 크라잉넛 이후 가장 급진적인 사건: 장기하, 인디음악의 역습) 따위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가지는 미덕은, 쉬운 복고적 멜로디와 재미있는 가사와 랩, 그리고 이것들을 편안하게 청자에게 전달해 주는 안정된(전혀 실험적이지 않은) 편곡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주류 언론의 호들갑스러운 이슈 만들기의 도움을 받아 ‘뜰’ 수 있었던 것이다.
빅뱅이나 소녀시대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이유가 무얼까. 이들의 ‘노랫말’ 속 정서가 일반 대중의 정서와 부합해서? 첫째 이유는 적당히 쉽고 적당히 트렌디한 ‘음향’을 거대 기획사가 엄청난 자본을 투입해 유통시키고 홍보했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적으로만 볼 때에도, 한 곡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이유에 ‘가사’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다. 음악은 즉자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리뷰를 쓴 이가 순수히 ‘음악적’으로 “싸구려 커피”를 분석하고 있지도 않다. 도대체 무엇이 “새로운실험”이라는 말인가? 장기하의 음악은 근래 인디씬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이지 않은’ 사운드를 들려 주는데도 말이다. 차라리 장기하 소속 붕가붕가 레코드의 눈뜨고코베인이나 술탄 오브 디스코의 음악이 훨씬 새롭고도 뛰어나다고 하겠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사람들의 자신감이 늘어날수록 새로운 대중음악 실험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할 수 있다”는 마지막 말에 대해서도 나는 회의적이다. 앞서 언급한 모든 음악들은 새로운 실험과는 무관한 음악이며, 글쓴이는 ‘노랫말’에 대한 개인적 해석을 가지고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실험’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대중음악의 실험이 그렇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쓴이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예로 든 크라잉넛, 장기하, 국카스텐 등의 음악은 그러한 주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한 점을 말하기 위해선 차라리 영국의 클래시(Clash)나 미국의 RATM, 한국의 윤도현밴드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서 시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보를 표방한 신문이 대중에게 더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는 건 좋다. 하지만 〈레프트21〉의 정치 기사들이 그러한 것처럼 예술 분야에서도 명확하고 전문적인 분석이 있어야 더 넓은 독자를 얻기 위한 공감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