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원석 영화칼럼:
뱀파이어가 영생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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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세상 어딘가에 진짜로 있다고 하자. 그리고 우연찮게 한국에 왔다가 박찬욱 감독의 뱀파이어 영화 〈박쥐〉를 보았다고 하자. 그가 이 영화를 좋아할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박쥐〉가 형편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밀도 높은 연출, 근사한 촬영, 뛰어난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또, 늘 그래왔듯이 박찬욱 감독은 이번에도 스크린 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솜씨 좋게 충돌시켜 신선한 영화적 리듬과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점에서 그는 〈전함 포템킨〉(1925) 으로 유명한 거장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 감독의 몽타주 이론 ― 이미지나 쇼트(Shot) 같은 영화의 구성단위들을 서로 충돌시켜 새로운 영화적 감흥을 창조하는 방법 ― 을 가장 잘 이해하는 한국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뱀파이어 입장에서 보자면 〈박쥐〉는 기분 나쁜 영화다.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에 기초했다는 이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다룬 치정 살인극일 뿐이다. 뱀파이어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모티브들, 예컨대 흡혈, 영생, 전염 등과 같은 것들이 정작 영화의 전개와는 큰 상관없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들을 쥐락펴락했던 뱀파이어의 매력들이 여기선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될 뿐이다. 〈박쥐〉에서 뱀파이어는 제목과 달리 홀대 받고 있다.
뱀파이어가 이렇게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가 개봉되던 1990년대 중반까지는 대접이 괜찮았다. 그때는 뱀파이어를 통해 나름 심각한 사유도 가능했다. 영생의 권태, 실존주의적 딜레마, 동성애, 성과 죽음에 대한 논의 등 많은 진지한 화두들이 뱀파이어를 둘러싸고 등장했다.
하지만 이젠 밑천이 바닥났다. 수많은 소설들, 영화들이 너무 많이 우려먹어서 모든 게 고갈됐다. 요즘의 뱀파이어는 〈박쥐〉처럼 액세서리 취급받거나, 〈블레이드〉 시리즈처럼 뱀파이어 헌터한테 쫓겨 다니거나, 〈언더월드〉(2003)처럼 늑대인간과 치고받는 굴욕을 감수해야 관객들의 흥미를 겨우 끌 수 있는 처량한 처지가 됐다.
그러면 뱀파이어의 문학적, 영화적 수명은 이제 다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뱀파이어는 영생한다. 영생해야 하기 때문에 영생하는 게 아니다. 영생의 진짜 이유는 창작자들의 상상력과는 무관하다.
호시절
동서고금을 걸쳐 뱀파이어 괴담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런데 이것이 문화에 영향을 끼칠 만큼 커진 것은 질병의 전염과 확산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예컨대 중세 흑사병은 유럽 흡혈귀 민간설화의 기초였다. 최초의 뱀파이어 소설인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1819)의 경우는 18세기 동 프러시아를 휩쓴 뱀파이어 열풍에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 각종 전염병이 동 프러시아에 창궐했던 게 그 열풍의 배경이었다. 그리고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1897)가 19세기 말 인기를 끌었던 것은 결핵과 매독으로 몸살을 앓던 당시 영국 사회 분위기와 관계있었다.
과학과 의술이 발전했다는 20세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공포소설의 거장인 리처드 매드슨의 걸작 《나는 전설이다》(1954)는 냉전, 핵전쟁과 함께 세균전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았다. 또 1980년대를 휩쓴 에이즈의 공포는 현대 뱀파이어 소설과 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뱀파이어 괴담은 질병에 대한 공포를 먹고산다. 그러니 질병의 전염과 확산이 끊이지 않는 한 뱀파이어는 소설과 영화에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다. 성능 좋은 핵무기는 무수히 만들면서 신종플루 하나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요즘 같은 야만의 시대야말로 뱀파이어에겐 호시절이라고 하겠다.
참고로, 〈박쥐〉가 성에 안 차는 독자들에게는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렛미인〉(2008)을 권한다. 이지메 당하는 아웃사이더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는 굳이 뱀파이어 장르 팬이 아니더라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