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무역이 제3세계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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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올라 하루 종일 카카오를 따는 일을 6살부터 하는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은 정작 너무 가난해 초콜릿을 먹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만성적인 빈곤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며 제대로 된 교육과 의료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자유무역,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이런 끔찍한 결과로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실제 자유무역은 생산자들에게 절대 불리한 유통 구조를 강요한다. 현지에서 70달러에 거래되는 50킬로그램짜리 커피 한 자루가 영국 런던에서는 1백80곱절인 1만 3천 달러에 거래된다. 땡볕에서 피땀 흘려 일하는 가난한 농민들은 전체 몫에서 고작 0.5퍼센트 남짓 가져가고 나머지 전부를 다국적 기업들과 중간 상인들이 갈취해 폭리를 취한다.
공정무역은 시장 가격 변동에 상관없이 생산 농민들에게 최저 가격을 보장하고 보통 소매가격의 2퍼센트 정도를 ‘사회적 프리미엄’으로 제공한다. 이 ‘프리미엄’은 병원·학교 건립, 상수도·화장실·전기시설 구축 등 지역사회 개발에 쓰인다. 그래서 ‘부의 재분배를 통한 소득의 균형을 바로잡는 구실’을 하는 공정무역은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아주 현실적인 실천방식’이고 ‘주류 무역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실용적 방안’(《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 공정무역》, 모티브북)이라는 것이다.
공정무역으로 거래되는 상품은 커피, 초콜릿, 바나나, 녹차, 축구공, 면직물 등 2천여 품목에 달한다. 제품 수는 21세기 들어 첫 5년 동안 15곱절이 넘게 증가했고, 교역량도 매년 20퍼센트씩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아직 규모가 작지만 공정무역 커피의 매출이 연 2백~3백 퍼센트씩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는 공감할 측면이 많다. 이는 가격이 싸지만 생산자들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는 자유무역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또, 부를 재분배해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열망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착한’ 마음과 상관없이 공정무역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공정무역으로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 수준을 충분히 개선할 수가 없다. 공급과 가격 안정을 위한 국제커피협정이 다국적기업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에 의해 1989년 깨졌다. 이 기구들은 커피 등을 재배해 현금을 마련해서 부채를 상환하라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을 다그쳤고, 이런 요구들에 응할 때만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결과 커피가 과잉 생산돼 국제 커피 가격이 하락했다.
1977년 커피 가격은 파운드당 2백18센트였지만, 2002년에는 43센트로 그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2천5백만 명에 이르는 세계 커피 농민 중 3분의 2가 절대적 빈곤 속에 살고 있다. 코코아도 비슷하다. 1977년 파운드당 4백89센트이던 가격이 2000년대 초 51센트로 급락했다. 제3세계 농민들의 빈곤과 굶주림을 담보로 네슬레, 크래프트, 스타벅스 등 다국적기업들이 막대한 폭리를 취한 것이다.
공정무역 커피는 일반 커피보다 비싼 파운드당 1백26센트를 농민에게 준다. 그러나 이 가격으로 농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삶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이는 30년 전 가격의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실제로 공정무역의 혜택을 보는 농민들도 충분치 못한 소득 때문에 도시에서 임시직으로 소득을 보충한다.
공정무역 가격은 일반 가격보다는 비싸지만, 그렇다고 소비자들이 살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비쌀 수는 없다. 공정무역은 일부 ‘착한’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비싸지만, 아직 그만큼 ‘착하지 않은’ 소비자들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비싸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공정무역 제품의 가격은 진정 ‘공정’하기보다는 시장이 허용해 주는 한도 내에서 ‘공정’한 것이다.
편승
최근 다국적 기업들도 공정무역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에 편승하고 있다. 자신들이 제3세계 농민들을 수탈한다는 이미지를 지우려고 공정무역 상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슬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식품 회사로 8천5백여 가지 제품을 생산한다. 그러나 공정무역에 대한 호들갑스런 홍보의 이면을 보면 공정무역 제품이 고작 한 품목이다. 다국적기업 크래프트도 ‘공정무역’ 커피를 판매하지만 최소 가격인 파운드당 1백26센트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일종의 ‘사회적 공헌’ 활동을 기업 홍보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뿐이다. 이윤을 위해 그동안 농민들을 수탈해 가난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그 농민들의 가난을 이용해 또다시 배를 불리는 것이다.
가격이 비싼 공정무역 상품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입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있다. 월 소득 4백만 원 이상의 사람들 중 77.9퍼센트가 “가격이 적당하면 구매한다”고 답한 반면, 월 1백만 원 이하 저소득층의 39.7퍼센트는 “구매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아름다운가게). 실제로 월 소득 3백만 원 이상의 사람들이 전체 공정무역 상품의 81퍼센트를 구입한다(한겨레경제연구소). 이는 중산층 이상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이 공정무역 상품의 주소비자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산층 이상은 ‘착하고’ 저소득층은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공정무역 상품 구매는 경제적 능력에 따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증가함에도 공정무역 커피의 교역 비율은 0.1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
더구나 네슬레와 크래프트라는 두 다국적기업이 전체 커피의 78퍼센트를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이윤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는다면 제3세계 농민의 삶이 개선될 수 없다.
이처럼 공정무역은 그 선한 의도와는 별개로 ‘공정’하지 않은 자본주의 체제에 큰 파열을 내기 힘들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시장을 이용해서 제3세계 빈곤을 해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애덤스미스연구소의 얄궂은 표현처럼 “공정 무역 운동이 성취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상징적인 승리일 뿐이다.”
체재 내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면 공정무역을 강조하는 자선단체 옥스팜처럼 ‘잉여’ 커피를 불태워 없애 커피 가격을 올리자는 주장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한참 빗나간 것이다. 매일 10만 명이 굶주림 때문에 죽지만 곡물 가격을 유지하려고 바다에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을 버리는 미친 짓거리와 비슷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생산과 분배의 전 세계적 불평등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선한 개개인들의 ‘착한’ 소비로는 부족하다. 집단적인 대안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실천방식’이다. 무엇보다도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다국적기업들에게 돌아가는 막대한 폭리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리는 ‘부의 재분배’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