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타밀호랑이의 분쇄가 스리랑카의 평화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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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군이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 즉 타밀호랑이가 통제하던 지역에 대한 잔혹한 군사작전을 끝냈다. 타밀호랑이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살해됐다.
타밀호랑이가 분쇄됐으니 이제 평화가 올 것이라고 떠벌리는 언론들은 두 가지 점을 놓치고 있다.
먼저 타밀 지역에서 7천 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타밀호랑이가 아니라 스리랑카군의 책임이다. 게다가 최근 TV뉴스에서 타밀호랑이가 통제하는 지역에서 ‘탈출하는’ 것처럼 비춰진 난민들은 이제 악독한 스리랑카 정부가 만든 ‘재정착촌’에서 지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로, 이 위기는 1983년 LTTE가 주도한 분리주의 운동 때문에 촉발된 게 아니다. 타밀족의 분리주의는 인구의 대다수인 상할리족 출신 지배자들이 지난 수십 년간 부추겨 온 차별과 학살에 대한 대응이었을 뿐이다.
스리랑카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종족 간 분열지배 전술을 썼지만 실제 종족분쟁이 본격화한 것은 영국에게서 독립한 뒤였다. 이 수법은 1906년 짐마차꾼들의 파업에서 시작된 종족을 뛰어넘는 노동계급 단결의 전통에 맞서려는 시도였다.
반대 사례는 1912년 열차노동자들의 파업이다. 당시 관리인들은 싱할리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타밀 정서를 부추겼고 파업은 패배했다. 반면 1920년 종족을 뛰어넘어 단결한 열차노동자, 항만노동자의 파업은 승리했다. 1923년 총파업도 마찬가지로 승리했다.
박탈
1948년 독립과 함께 통합국민당(UNP)이 권력을 잡았다. UNP가 처음 도입한 조처 중 하나는 스리랑카에서 1백 년 넘게 거주하며 홍차 재배지에서 일해 온 [인도 출신] 타밀족 노동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 조처는 타밀족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것이었고, 심지어 스리랑카에서 1천 년 넘게 살아 온 타밀족도 진짜 시민이 아니라고 암시하는 것이었다. 대입 시험과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일어난 변화는 타밀족 중간계급이 정부 내에서 일자리 얻기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1951년 UNP의 분열로 스리랑카자유당(SLFP)이 만들어졌고 이 당은 사회주의 정당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SLFP는 오히려 더 극단적인 싱할리족 우월주의를 내세웠다.
1956년까지 SLFP의 선거전략은 스리랑카의 불교적 전통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싱할리족의 다수는 불교 신자인 반면, 타밀족의 다수는 힌두교 신자다. SLFP는 또 싱할리어가 유일한 공식 언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밀족은 큰 시위를 벌이며 저항했다. 이들의 집회는 평화로웠고, 간디의 비폭력 저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공공연히 밝혔다. 그럼에도 그들은 공격받았고, 전국을 휩쓴 반타밀 폭동으로 최소 1백50명의 타밀족이 죽었다.
1970~77년 SLFP와 다른 두 극좌파 정당이 연합해 구성한 공동전선 정부는 이보다 더했다. 이 정부는 국호를 실론에서 더 불교적 명칭에 가까운 스리랑카로 바꿨고, 타밀족에 대한 차별 수위를 높였다.
1977년 선거로 집권여당이 바뀌었지만 타밀족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다시 전국을 휩쓴 폭동으로 타밀족 난민이 3만 5천 명 이상 생겨났다. 경찰은 직접 타밀족을 공격하거나 그들에 대한 공격을 도왔다.
바로 이때, 무장저항을 자신의 강령으로 삼은 LTTE가 부상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LTTE는 스리랑카 타밀족들 사이에서 유력한 정치 세력은 아니었다. 타밀족에 대한 억압이 계속되면서 LTTE의 영향력이 커졌다.
싱할리족 지배계급의 종족 우월주의와 스리랑카 좌파의 무능 때문에 타밀족은 대안으로 분리주의를 받아들이게 됐다.
타밀족 사회주의자 아 시바난단은 이렇게 말한다.
“지독한 인종차별, 표현의 자유 억압, 남부에서 언론인들과 정부 비판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 대한 살해 등 LTTE의 군사 저항을 낳은 원인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앞으로도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