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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석 영화칼럼:
아이, 노인, 여자 그리고 영화

몇 년 전 어느 단편영화제에서 예비심사를 맡은 적이 있다. 보름 동안 무려 삼백여 편의 영화들을 봐야 했는데 고된 작업이었다. 하루 종일, 그것도 두 주 넘게 영화만 보고 있자니 몸이 힘들었다. 또 다들 나름으로 정성껏 만들었는데 누구는 합격시키고 누구는 떨어뜨려야 했으니 마음도 불편했다. 더구나 내가 예심을 맡은 부문이 하필이면 사회 드라마 섹션이었다. 어두운 현실, 소외된 인간, 비극적인 역사 등을 다루는 영화들 일색이었다. 심사하는 내내 기분까지 우울했다.

그런데 예심을 하며 조금 놀랐던 점이 있다. 현실 비판적인 이런 영화들에서 아이, 노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 캐릭터들이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아이나 노인들이, 필요할 때면 너무 쉽게 등장하거나 불쌍하게만 묘사되곤 했다. 아이나 노인은 영화에서 관객의 동정을 쉽게 불러일으킨다. 〈워낭소리〉(2008)를 보라. 노인의 얼굴은 카메라가 슬쩍 비추기만 해도 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의도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 점에 기대는 건 영화적으로는 게으르고 창조적이지 않다.

여성 캐릭터를 쉽게 소모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꼭 여자가 성폭행 당하거나 잔인하게 짓밟히곤 했다. 이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인상 깊게 하려는 것인 듯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비유 - 여성을 순수함으로 치환하고 이런 순수함이 파괴된다는 식 - 는 한물간 옛 소설들에나 어울릴 법한, 낡고 식상한 상상력이다. 또 여성 관객 처지에서 보자면 당연히 불쾌할 것이다. 근데 공교롭게도 이런 영화들이 백이면 백, 다 남자 감독의 작품들이었다.

사회적 약자 캐릭터 남용하기

이런 예는 5·18 광주와 관련한 장편 영화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5·18 관련 영화들은 가장 치열한 작가적 의식의 산물이다. 한국 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역사적 사건인 만큼, 이를 다루는 창작자의 자의식이 그 깊이나 강도 면에서 다른 영화들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도 약자, 특히 여성 캐릭터를 다룰 때 종종 위와 같은 약점을 드러낸다.

〈부활의 노래〉(1990)나 〈화려한 휴가〉(2007) 등은 영화적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니 논외로 하자. 물론 〈부활의 노래〉는 허술하고 진부하지만 시대적 정황이 부여한 나름의 품격이 있다. 반면 〈화려한 휴가〉는 액션 팝콘 무비로는 그럭저럭이지만 5·18 영화로는 민망할 정도로 격이 떨어진다. 솔직히 관람을 권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을 우선 언급할 만하다. 〈꽃잎〉은 장선우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과 지금은 가수로 유명한 배우 이정현의 신들린 연기가 어우러진 수작이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소녀를 순수함으로 치환하고 그녀의 수난을 통해 비극을 증폭시키려 했다는, 낡은 방식을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2000)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도 수작이지만, 주인공 영호(설경구)의 타락이 광주에서 어린 여학생을 실수로 죽였기 때문에 시작됐다는 설정에는 〈꽃잎〉과 같은 종류의 진부함이 있다.

여성주의적 논의가 활발한 요즘에는 이와 관련해 확실히 변화가 있다. 역시 5·18 관련 영화랄 수 있는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2007)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윤희(염정아)는 역사의 희생자나 수동적인 보조자가 아니라 당당하고 씩씩하며 능동적인 미혼모다. 여성 캐릭터의 이런 변화는 과거에 비해 진일보했다. 하지만 이 경우 다른 취약점을 드러낸다. 영화는 80년대 운동의 처절한 ─ 너무 처절했기에 때로는 비이성적이기도 했던 ─ 면들에 대해 이해하거나 동조하기보다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하는 윤희의 관점에 무게를 둔다. 이것이 건조한 연출 스타일과 어우러져, 영화가 80년대 운동 일반에 대해 냉소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의 완성도를 정치로 환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치적 의식이 강한 영화에서 정치를 빼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광주항쟁 30주년을 앞둔 요즘, 이 모든 약점들을 극복한 영화, 특히 5·18 관련 영화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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