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톈안먼(천안문) 민중 항쟁의 진정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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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한 명의 시위 참가자가 탱크 부대의 진입을 막는 장면을 보면서 감동했다. 중국군의 막강한 무력을 혈혈단신으로 막는 이 장면은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 항쟁을 대표하는 장면이 됐다. 톈안먼 항쟁은 중국 지배자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중국 통치자들은 무지막지한 폭력을 사용해 가까스로 항쟁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톈안먼 항쟁이 준 영감을 지울 수 없었고, 톈안먼 항쟁을 발생시킨 원인들 ― 동일한 원인들이 오늘날 저항을 촉발하고 있다 ― 을 해결할 수도 없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톈안먼 항쟁이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자유시장 개혁을 지지하는 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정부 관료들의 부패와 세계시장 진출 시도가 낳은 모순에 반대해 거리로 나섰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독립적 국민경제를 건설하고 싶어 했다.
비록 공산당 지도자들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막상 그들의 정책은 수억 명의 중국 농민과 노동자 들의 필요를 부차적으로 취급했다.
국가자본주의
〈소셜리스트 워커〉는 이런 국가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국가자본주의 경제는 계급 분열과 착취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경쟁하는 민간 기업들이 아니라 국가가 생산을 통제한다.
마오쩌둥 정부는 당시 소련 ― 스탈린 통치 아래 국가자본주의가 됐다 ― 을 본따 사회를 조직하려 했다.
1976년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권좌에 올랐다. 그는 중국의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 즉, 학생·노동자·농민 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저항들이 벌어졌지만,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이 상황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의 죽음이 촉발한 민주화 시위로 바뀌기 시작했다.
후야오방은 1980년대 공산당 총서기로, 중국과 티베트에서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국가 관료들은 1987년 그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관료들은 후야오방이 학생 시위에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후야오방이 죽은 다음 날, 학생들은 그를 추모하려고 베이징 중심가에 있는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추모자의 숫자는 며칠 만에 수만 명으로 늘었고, 노동자들도 많았다.
광장에서 발언한 사람들은 민주적 선거, 언론·집회의 자유, 관료들의 부패 척결 등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다른 도시들에서도 시위와 파업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익들은 보통 톈안먼 광장에서 있은 개인들의 용맹한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당시 중국 지배자들이 왜 그렇게 겁에 질렸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중국 전역을 휩쓴 대규모 시위에 주목해야 한다.
겁에 질린 지배자들은 4월 22일 후야오방 장례식 날에 모든 시위를 금지했다. 경찰과 군인 들이 톈안먼 광장을 봉쇄했다.
그러나 밤새 학생 대열이 밀려들면서 결국 경찰 저지선을 뚫었다. 다음 날 15만 명이 톈안먼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연설을 듣고, 붉은 깃발을 흔들고, 사회주의자의 노래이자 톈안먼 항쟁의 노래가 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정부는 학생들을 진압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지배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일부 지배자는 군대가 시위대 진압 명령에 어떻게 대응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군이 계속 정부를 지지할지 알 수 없었다.
후야오방 장례식이 끝난 후 학생들은 “민주주의 만세, 독재 타도”를 외치며 톈안먼 광장에서 행진해 나왔다.
4월 27일 15만 명이 베이징 거리를 행진했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공장과 작업장 들은 휴업을 했고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시위대에 지지를 보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은 군인들이 시위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잠시 소강 상태를 거친 후, 5월 13일부터 소수의 학생 지도자들이 단식을 시작했다. 이것을 계기로 톈안먼 시위는 새로운 절정을 향해 갔다.
계엄령과 저항
처음에 2백 명이 단식에 참가했지만 곧 1천 명을 넘어섰다. 시위대 수만 명이 톈안먼 광장을 점거했다. 단식 참가자들은 덩샤오핑 사퇴와 총리 리펑의 해임을 요구했다.
다음 날 시위대가 1백만 명으로 늘었고, 그 다음 날에는 무려 2백만 명에 달했다.
중국 정부는 단식을 중단시키려 애썼다. 리펑과 학생들의 개혁 요구에 동정적이었던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시위대와 면담했다.
이 회담이 실패하자, 정부는 5월 19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인 30만 명이 베이징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학생과 노동자 들은 군대의 진입을 막으려고 베이징 외곽에 인간 바리케이드를 형성했다. 지하철 노동자들은 지하철을 군인 수송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전력을 끊었다. 베이징 수도철강 노동자들은 작업장을 박차고 나왔고, 다른 많은 노동자들도 출근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버스, 트럭, 건설 차량들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수백만 명이 군대를 저지하려고 거리에 나섰다.
대중의 힘 앞에 정부는 한발 물러섰고, 지배계급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 줬다.
당시 베이징에 있던 두 목격자는 〈소셜리스트 워커〉에 이렇게 말했다. “민중이 48시간 째 베이징을 통제하고 있다. 분위기는 긴장돼 있지만, 술에 취한 사람도, 약탈도, 폭력도 없다.
“1킬로미터에 걸쳐, 1백여 대 이상의 버스를 빽빽이 겹치게 배치해 도로를 봉쇄했다. 이 바리케이드로는 탱크를 막을 수 없고, 원래 목적도 그것이 아니다. 군대의 이동을 방해하고 지연시켜 사람들이 병사들에게 돌아갈 것을 호소할 시간을 벌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실제로 지난 며칠 동안 사람들은 그런 시도를 해 왔다.
“노동자와 학생 들이 6평방마일 정도의 넓이인 도시 중심부 전체를 통제하고 있다. 노동자와 학생 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사방에서 지나가고 있다. 트럭에는 붉은 깃발과 현수막이 나부꼈고, 트럭에 탄 사람들은 바리케이드 사이를 이동하면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 그들은 인터내셔널가를 계속 불렀다.”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1997년 중국으로 반환을 앞둔 홍콩에서도 1백만 명이 지지 시위를 벌였다.
베이징에서는 교착상태가 지속되면서 정권이 한숨 돌리며 다음번 대응을 준비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과 여섯 명의 군지휘관들은 톈안먼 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전담 부대를 꾸렸다.
6월 3일 부대들이 베이징으로 진입했다. 이른 아침, 장갑차와 탱크 들이 톈안먼 광장을 뚫고 들어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중국군의 공식 명칭은 ‘인민해방군’으로, 이때까지 사람들은 ‘인민해방군’이 정말로 발포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놀란 노동자들은 학생들을 위해 거리로 나섰고, 많은 노동자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고 군인들을 향해 벽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군인들은 다음 날 오후까지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고 나서야 저항을 진압할 수 있었다.
중국 적십자는 이때 2천6백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가 나중에 정부의 압력을 받고 철회했다. 수천 명이 부상했고, 병원들은 부상자들로 넘쳤다.
그러나 탄압은 계속됐다. 수만 명이 체포되고 상당수가 처형됐다. 6월 5일 탱크를 멈춘 익명의 시위 참가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덩샤오핑과 중국의 지배자들은 자유시장 개혁을 지속했고, 중국 사회는 더 불평등한 사회가 됐다.
지난 몇년 동안 노동자들이 억압적 경영자와 해고에 맞서 파업과 시위를 벌이고, 농민들이 부당한 세금 부과와 관료들의 부패에 맞서 싸우면서 투쟁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학생들도 싸우고 있다.
20년 전 톈안먼 광장에서 볼 수 있었던 저항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1989년 톈안먼 항쟁은 비록 학살로 막을 내렸지만, 중국 노동자·농민·학생 들이 중국 지배자들에 도전하고 심지어 그들을 몰아낼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줬다.
그래서 베이징의 도살자들은 여전히 밤잠을 설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