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자주적 민주주의”는 계급 협력주의로 향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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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지도부는 대의원대회(6월 20~21일)에 제출할 당의 이념을 “자주적 민주주의”(또는 “진보적 민주주의”)로 하는 안을 내놓았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 계승 발전”)을 사실상 폐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노동당의 최대 다수파인 자주파는 일찍부터 사회주의 강령을 반대해 왔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정당으로 비춰질 경우 유권자로부터 표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선거주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차베스가 사회주의라는 최대 강령을 갖고 시작했다면 선거를 통해 집권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민주노동당 2009 제2차 중앙위원회 자료집 98쪽)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자주파가 추구하는 전략과 관계 있다. 스탈린주의의 단계혁명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변혁은 일정에 올라와 있지 않다. “전반적인 사회적 소유는 현실의 한계로 인해 당분간 구현하기에는 과도한 목표”이기 때문이다(98쪽). 그래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족 자주’를 수호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내세우는”(22쪽) “자주적 민주주의”를 먼저 실현해야 한다.
애초 단계론은 후진국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미약해 전자본주의적 잔재가 많고(중앙위원회에서 최규엽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장은 한국 사회가 “반(半)봉건적”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로 말미암아 노동계급의 규모도 아주 작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건너뛸 수 없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 변혁 전략은 비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매우 크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관계의 지배라는 한계 내에 머무르는 것”이고, “〈span〉모든〈/span〉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발전 수준이나 사회 구조나 전통 등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즉 모든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배하고 있다.”(트로츠키)
더구나 한국 자본주의는 후진국이나 제3세계가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가 미국 자본주의의 하위 동맹자로 성장해 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것이 한국이 미국 제국주의에 “종속”돼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한 예로,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 수출 대상국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됐으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최대 투자국도 미국이 아니라 유럽연합이다.
또, 한국 국가는 이미 10여 개 이상의 나라에 한국군을 파병해 놓고 있다. 이것은 단지 미국 제국주의의 압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한 한국 국가의 능동적 전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국 자본주의는 1960년대 후반 이래 변화하기 시작한 세계 자본주의의 패턴, 즉 경제의 상호침투 과정(자본의 국제화)에 적극 뛰어듦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고(오늘날 한국 국내총생산 규모는 세계 12위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형성됐다. 계급 분단이 근본적인 사회적 분할선이 된 것이다.
계급 협력주의
그러나 자주파는 한국 자본주의의 “예속성”과 “천민성”을 강조하며 “민족 자주”를 “핵심 목표”로 삼는다. 자주파에게 “민족 자주”는 곧 민족통일을 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근원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통일이 전략적 과제”(107쪽)가 된다.
이를 위해 범계급적 단결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주적 민주정부의 집권 주체”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고 소생산자, 양심적인 민주 세력, 청년학생”과 함께 “제국주의 자본과 국내 독점자본에 저항하는 영세상공인뿐 아니라 미일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분단을 극복하려는 통일운동세력”까지 포함한다.(107쪽)
이런 국민전선(민중전선) 전략에 따르면 ‘민족화합적’ 자본가들과 냉전적 자본가들이 구별된다. 2001년에 정주영이 죽었을 때 범청학련이 조문을 한 것도 이 전략에서 비롯한 것이다.
지난 2월 15일 중앙위원회의 결정, 즉 “‘민주당과 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은 정당의 정치 행위를 스스로 봉쇄하는 그릇된 결정”(177쪽)이라며 평가를 요구하는 것도 이런 계급 연합 전략을 되살리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이 전략적 과제”라면 민족통일이 계급투쟁에 선행해야 한다. 물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는 민족자결권을 옹호한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평화적 민족통일을 지지한다. 더구나 한반도는 민족구성원 대다수의 의사를 거슬러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이 이뤄졌다.
그러나 통일은 노동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니다. 계급투쟁보다 부차적이다. 분단 60년 동안 남과 북 모두에서 자본 축적의 중심이 형성됐고 그 과정에서 계급 분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는 남북화해나 통일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에 반대한다. 반면, “통일이 전략적 과제”라고 여기는 자주파는 노동자들이 계급 이해 관계에만 얽매이지 말고 통일운동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의 교훈
그렇다면 어떤 조건이 돼야 사회주의 변혁이 현실 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자주파에게 사회주의는 자주적 민주정부가 “추구하는 국가상과 사회상”이다.(98쪽) 그러나 그들의 구상에서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서 노동계급의 결정적 구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고 본다.
요즘 상당수 자주파는 차베스의 볼리바르식 혁명이 자주적 민주정부에서 사회주의로 이행 모델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우고 차베스는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운동의 상징처럼 돼 있다. 그리고 최근에 경제 위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해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개혁도 제공했다.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선거를 통해 집권한 진보적인 정부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차베스 정부가 우파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사회(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좌경화 물결 덕분이다. 이 좌경화 물결에는 두 가지 상이한 구성 요소가 존재한다. 차베스 정부는 이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결과에 반대하는 노동자, 도시 빈민, 농민, 원주민의 대중 반란이다. 다른 하나의 중심에는 국민 자본주의 또는 국가 자본주의 개발이라는 포퓰리스트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지식인과 (일부 장교들을 포함한) 중간계급이 있다. 물론, 후자도 미국 제국주의 이해 관계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대중 운동을 자신들이 지배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두 구성 요소는 상호 영향을 미친다. 중간계급 정치인이나 장교들의 반제국주의 도전은 대중으로부터 열렬하게 지지받는다. 이것이 대중 저항을 고무한다. 차베스 정부 전복 시도에 맞서 차베스 방어에 나선 대중적 동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일부 중간계급 활동가들과 장교들은 대중 운동에 열광하고 그 요구들 중 일부(가령, 국유화)를 채택한다.
그럼에도 사태전개의 논리는 두 구성 요소를 상이한 방향으로 이끈다. 국민경제 발전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토착 부르주아지가 제국주의와 단절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잉여 축적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들에게 대중의 경제적 요구는 제국주의 압력만큼이나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한국에서 자주적 민주정부가 집권한다면 이런 상황에 직면해 어떻게 할 것인가? 대중의 요구를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경제 발전을 우선할 것인가?
게다가 차베스가 수장으로 있는 국가 기구는 자본주의의 이해 관계를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 국가 기구는 잘해야 건성으로 개혁을 수행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개혁을 사보타주한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등장할지라도 국내외 지배계급으로부터 개혁에 대한 심각한 저항이 있을 것이다. 반동에 맞서 후퇴 없이 반독점 민주개혁을 지키려면 노동계급의 힘이 필요하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진정으로 발휘하려면 자기해방 투쟁이 돼야 한다. 그러나 자주적 민주정부의 계급 협력주의는 노동계급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 국내외 지배계급은 분명한 위기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혼란, 분열, 충격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의 경제 지배력에 도전하고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노동계급적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자주적 민주주의에 담겨 있는 계급 협력주의는 이런 과제 수행을 방해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내놓으려는 자주적 민주주의 이념은 전략적 오류를 범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