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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급진적 개혁주의자가 본 대한민국

“‘무한 경쟁주의’의 지옥에서 ‘왼쪽’으로의 행진만이 우리의 미래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며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해 온 박노자 교수는 새 책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에서도 비판의 칼날을 놓지 않는다. 이 책은 그의 다른 저작들처럼 예리한 비판, 섬세한 감수성, 풍부한 사례로 가득하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박노자, 한겨레출판, 2009년, 12,000원, 323쪽) ●구입

그는 삽질과 수출에 목매며 “시대착오적인 토건 국가, 수출 국가, 안보 국가 모델”을 고수하는 이명박을 매섭게 비판하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박노자는 ‘기업의 준독재’ 상황인 한국에서 가장 중시하는 ‘자유’란 “기업인들이 여성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자유’”라고 꼬집는다.

그는 사회적 불만을 ‘경찰 출동’으로 억누르려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며 이런 ‘퇴행’은 저항을 낳을 수밖에 없고, 더구나 경제 위기 때문에 온갖 사회적 갈등이 “초고속으로 첨예화”할 것이라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이명박의 임기는 ‘밑으로부터’의 항쟁으로 점철될 것”이라 예측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와 재벌, 대물림되는 교육 체계와 기업의 지배로 얼룩진 ‘명문’ 대학교, 하나님과 부처님을 팔아 장사하는 종교인 등 박노자의 비판에는 성역이 없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10년간의 ‘개혁’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각종 악법 폐지, 비리 척결로 관료제 개선, 재벌에 대한 적당한 규제, 부동산 투기 방지 중에서 ‘개혁’ 정부가 성취한 것은 ‘햇볕 정책’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온건 개혁이 아닌 사회주의적·사회민주주의적 세력이 주도하는 급진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박노자의 주장이다.

그가 제시하는 급진적 개혁은 대형 기업의 국유화, ‘토건 국가 예산’을 교육·복지 예산으로 전환해 무상교육·무상의료 실현, 각종 부유세 징수, 부동산 투기로 벌어들인 재산 몰수, 대학 평준화,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국방 예산 삭감 등이다.

박노자는 이런 ‘질적 변화’를 만들 주체 세력은 진보 정당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보 정당이 의회 내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밑으로부터의 직접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무상교육을 요구하는 전국 대학생의 총궐기, 의료 공공성 확대를 요구하는 병원 노동자의 파업, 동시다발적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 같은 대중 행동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강조하면서도 박노자는 이런 행동을 한사코 혁명과는 연결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 같은 “준핵심부 나라에서 진짜 ‘혁명’이 일어날 확률이 대단히 낮”은 반면 그가 제시하는 급진 개혁을 통한 복지국가는 “실현 가능성이 비교적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노자의 주장처럼 급진적 개혁을 이루려면 아래로부터의 대중행동이 체제 자체에 도전할만큼 파괴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투쟁을 일으킨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완전히 종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고, 급진 개혁 요구를 따내고 투쟁을 멈춰야 하는가?

하물며 세계적 경제 위기 때문에 지배계급이 ‘개혁’을 양보할 여지가 현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체제 자체에 도전하지 않고서는 급진적 개혁 요구조차 성취할 수 없다.

대중 행동

박노자의 ‘혁명 불가론’은 역사적으로 혁명은 반드시 전쟁으로 귀결되고 도살, 겁탈, 강간 등의 야만적 상황이 뒤따른다는 생각과 연결돼 있다. 그래서 “피를 흘려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서 쟁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급진적 개혁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 과정의 안타까운 ‘유혈 사태’는 권력과 부를 순순히 내주지 않으려는 지배계급의 반동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사회 진보를 바라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 기득권을 침해한다고 느낄 때 지배계급은 절차적 민주주의 파괴는 물론이고 언제든 물리력을 동원해 ‘피’를 볼 준비가 돼 있다.

쌍용차 파업을 분쇄하기 위한 이 사회 지배자들의 온갖 악질적인 행태를 보라. 하물며 한 공장 문제에서도 이토록 잔인할진대 국가 전체의 권력이 걸린 문제에서 저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런 ‘유혈 사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봉기는 희생자가 거의 없었다.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봉기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 나타난 ‘도살, 겁탈, 강간’ 등 잔혹한 살상과 폭력의 책임도 노동자 권력을 파괴하고 자본주의로 돌아가려는 반혁명 세력에 있었다.

이것은 급진 개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1973년 칠레의 기업주와 군 장성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은 급진 개혁을 추구한 온건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에 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결국 아옌데는 죽임을 당하고 노조 대표자들과 좌파 활동가 등 3만 명이 학살됐다.

결국 박노자가 끔찍히 증오하는 자본주의의 폭력과 빈곤, 불평등을 종식시키려면 혁명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질 폭력을 줄이는 것은 전적으로 노동자 계급이 얼마나 강력히 단결해서 투쟁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편, 그동안 민족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해 온 박노자가 이번에는 그 비판의 방향을 잘못 잡고 있다.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반미’ ‘통일’ 등 아무런 현실적 내용도 없는 낭만적 구호들을 외쳐대는 것은 이명박류의 혹세무민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이명박에 맞서 투쟁하는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졸지에 이명박과 비슷한 수준이 돼 버렸으니 아마 이런 주장을 듣고 가장 놀랄 사람은 이명박일 것이다.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반미’ 투쟁은 반제국주의 저항의 일부다. 제국주의 열강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은 “낭만적 구호”이기는커녕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좌파 민족주의자들과 이명박에 맞서 함께 투쟁하면서 비판과 토론을 통해 그들의 약점과 한계를 입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단순히 거친 언사로 “거리 두기”를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는 한국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박노자의 사회 진보에 대한 변함없는 열망과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 사회 변혁에 대한 반대를 비롯한 몇몇 아쉬운 부분 때문에 그의 예전 책들보다는 감흥이 다소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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