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고용허가제 시행 5년:
고통과 비극을 낳은 현대판 노예제
〈노동자 연대〉 구독
8월 10일 YTN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농업 노동자로 일해 온 이주노동자들의 끔찍한 현실을 고발했다. 경기도 한 채소 하우스에서 일한 태국 여성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노동에 90만 원 월급을 받으며 휴일도 없이 일했고, 고용주의 성추행에 시달리다 도망쳤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농·축산업에서 이렇게 사업장을 ‘무단이탈’해 체류 자격을 박탈당한 노동자들이 1천 명에 이른다.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노조를 비롯해 이주노동자 노동 상담을 받는 곳 대부분에는 임금체불, 직장 내 학대, 산업재해, 부당 대우를 견디지 못해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가 줄을 잇는다.
이주노동자 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도입한 고용허가제 시행 5년 동안, 감금에 가까운 외출 통제, 15~16시간 혹사 노동 등의 문제들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 동포를 포함(방문취업제도)해 현재 약 50만 명이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데 이들은 인간다운 대우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한다.
애초 고용허가제 도입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높여 줄 것이라고 한 말은 거짓이었다.
고용허가제는 직장 이동 금지, 구직 기간 제한, 사업주에게 전적인 계약 갱신 권한 부여, 사업주의 직장 이탈 신고 권한 등을 명시해 사업주들의 전횡을 법적으로 보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제약은 이주노동자들의 체류 자격 박탈로 이어지기 때문에 수백, 수천 명의 경쟁을 뚫고 한국행 티켓을 얻은 노동자들이 사업주들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기는 매우 어렵다. 과거에 악명 높던 ‘산업연수제도’와 마찬가지로 ‘현대판 노예제도’인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고용허가제 옹호자인 설동훈 교수는 각국 정부들의 외국인력정책은 “국민국가의 이익 추구”이며 한국 정부 역시 ‘국익’을 추구하는 것이니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제약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주자 권리 제약이 내국인에게 이익인가?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국익’은 실상 국민의 다수인 노동자들의 이익과는 상관이 없다.
일례로 최근 국가인권위가 주최한 고용허가제 시행 5년 평가 토론회에서 노동부와 설 교수는 고용허가제를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 건설 현장에서 중국동포 이주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것이 내국인 건설 노동자들의 임금 하락과 고용 불안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즉, 고용허가제의 직장 이동 규제를 풀면 제조업 등에서도 내국인 노동자들의 임금 하락과 고용불안이 커질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건설 회사들의 높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건설 현장에서 판치는 고질적인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비호하고 용인해 건설 노동자들을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내몰아 온 것은 바로 정부였다.
건설업이든 제조업이든 일자리의 규모는 경제적 상황에 달려 있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대량 해고와 구조조정에 나서는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핑계로 내국인 노동자들의 고용을 걱정하는 것은 위선의 극치다.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쌍용차와 그 협력 업체 20만 명의 일자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정부와 자본가들을 떠올려 보라.
설사 내국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일자리 경쟁이 커지고, 임금 하락 압력이 생긴다 해도, 그것은 이주노동자들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원인은 노동자들 내에 차등과 차별을 두고 분열시켜 모두의 조건을 공격하는 정부와 자본가들의 책략에 있다. 그것에 맞서는 올바른 방안은 정부의 위선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국인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의 단결을 고무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최근 금속노조 경남지부 한국보그워너씨에스 현장위원회는 물량 축소를 이유로 이주노동자를 해고하려는 사측에 맞서 파업을 벌여 해고를 철회시키고,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가입시키는 소중한 승리를 거뒀다.
이것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대안이다. 이주노동자 권리 제약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이익을 얻는다는 신화에 매달리는 것은 진창으로 곤두박질치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