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애국주의’ 비판에 대한 몇 가지 문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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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규한 동지는 〈레프트21〉 13호 ‘좌파가 진보적 애국주의를 수용해야 하는가’ 기사에서 “헌법 애국주의가 대중적 논쟁 차원에서 진보진영의 전유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장은주 씨의 주장이 주관적 희망”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애국주의가 진보진영의 “전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진정 장은주 교수의 주장인가? 한규한 동지 자신이 인용한 구절에서 장은주 교수는 ‘진보정치는 오히려 올바른 애국주의로 무장하고서 우파가 독점하고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의 의미는 우파가 애국주의 담론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좌파가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 좌파가 애국주의를 독점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장은주 교수의 주장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은 아닌가?
2.
한규한 동지는 나아가 하버마스가 “인권이라는 지침을 가지고”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환영한 사실을 근거로 하버마스의 헌법적 보편 가치 옹호가 “실천의 시험대에서 심하게 비틀거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비틀거림은 현상적으로는 ‘인권’이라는 지침을 심각하게 잘못 적용한 데 따른 결과이고, 보다 근원적으로는 부르주아 지식인이라는 하버마스의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마치 그것이 헌법 애국주의 자체의 한계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한국 반전 운동이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대한민국 헌법 5조를 근거로 이라크 파병에 반대한 것이나, 일본 평화 활동가들이 ‘평화헌법’ 9조를 근거로 일본의 재무장에 반대하는 데서도 볼 수 있듯이 현실에서는 많은 저항 운동들이 사실상 헌법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함께 봐야하지 않을까?
3.
한규한 동지는 민주공화주의에는 근본적 결함이 있다면서 그 근거로 착취적 생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이상으로서의 ‘민주공화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속에 존재하는 현실의 ‘공화국’이 같은 것은 아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화국 구성원들’을 전제로 하는 민주공화주의의 이상 자체는 사회주의의 이상과 충돌하지 않는다. 문제는 (한규한 씨도 지적하듯이) 현실의 공화국이 기반하고 있는 착취 체제가 ‘공화국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진정한 결함은 민주공화주의라는 이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
한규한 동지도 이 점을 나름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의 서술 방식은 공화주의 이념 자체를 지나치게 문제 삼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마르크스처럼 처음에는 급진적 공화주의자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사회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좀 더 고려해 서술하지 않아 아쉽다.
4.
한규한 동지는 애국주의가 필연적으로 우익들을 이롭게 해 준다는 뉘앙스의 말들을 몇 군데서 한다. “좌파의 애국주의 담론은 …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노동계급이 희생해야 한다는 우파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촛불]시위의 주된 구호가 애국과 국익으로 설정됐다면 우파가 시위대의 논리를 공격할 기회를 더 자주 얻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현실은 좀더 복잡하다. 가령 촛불시위대가 ‘광우병 쇠고기의 위협으로부터 국민 건강을 지켜내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고 주장했다고 치자. 이런 논리가 우파의 애국주의를 조금이라도 강화시켜 주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파가 생각하는 애국과 촛불시위자가 생각할 법한 애국은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피착취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국익’이라고 했을 때 한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반면, 착취 계급에 속하는 자들의 경우 아무리 주관적으로는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해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국가 구성원 대다수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극소수의 이익에 봉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파적 애국주의의 본질적 모순이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가 각자 애국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충돌할 때는 경우에 따라 이 같은 본질적 모순이 표면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니들이 국민 건강을 볼모로 삼아가면서까지 추구하겠다는 국익이 도대체 누구의 국익이야?”). 이런 순간은 아무래도 진보진영보다는 우파에게 더 곤혹스러운 순간일 것 같다. 이런 순간에는 애국주의 일반을 싸잡아서 ‘버려야 할 낡은 관념’이라고 딱지 붙이기보다는, 필요하다면 ‘애국’의 언어를 차용해서라도 우파적 애국주의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