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원석 영화칼럼:
스플래터 영화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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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로지에 감독의 공포영화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한동안 프랑스를 시끄럽게 했다. 끔찍한 폭력, 고문 장면들 때문에 18세 등급 판정 ― 프랑스에서는 하드코어 포르노 영화 정도만 18세 등급을 받는다 ― 을 받아 논란을 빚었고, 그런 잔혹함 때문에 관람을 중간에 포기한 관객들도 많았다는 풍문도 있었다.
하지만 폭력, 고문 장면들 그 자체는 사실 생각만큼 심하진 않다. ‘고문 포르노’라고 비난받는 〈호스텔〉(2005)과 비교하면, 〈마터스〉의 장면들은 되레 싱겁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그토록 잔인하게 느껴지는 건 잘 연출된 심리적 분위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문을 기다리는 주인공의 절망감이 직접적인 고문 장면만큼 잔혹하게 느껴진다.
〈마터스〉는 어린 소녀 루시가 정체불명의 사람들에 의해 감금, 고문당하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간신히 탈출하지만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을 앓는다. 그리고 15년 뒤, 그녀는 어느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의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그들이 자신을 고문한 범인들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편 뒤늦게 따라 온 친구 안나는 이를 보고 갈등한다. 평범해 보이는 가족을 범인들이라고 우기는 정신분열 환자 루시를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중산층 가정집의 비밀 지하통로가 발견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줄거리 소개는 여기까지만 하자. 스포일러가 될 수 있고, 또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이 내러티브에 있진 않으니까.
장르를 조금 자세히 따지면, 〈마터스〉는 스플래터 영화(Splatter Film: 신체 절단이나 훼손 장면들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공포영화 하위 장르)다. 그래서 스플래터 영화의 핵심인 신체 훼손의 끔찍한 이미지들이 중요한 감상 포인트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이미지들이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실제로 많은 평론과 매체 들이 이를 변태적인 악취미나 싸구려 상술로 폄하하곤 한다.
하지만 신체 훼손 이미지의 본질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이미지가 대중화된 것은 20세기 초다. 제1차세계대전 후 등장한 예술사조인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대량살육을 동반한 세계대전의 광기가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관과 관계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무의식이나 꿈 등에 주목했고, 이런 반의식적인 감수성을 토대로 사회가 금기시하는 것들을 도발적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이런 도발의 충격을 통해 기존 가치관을 맹신하는 관객들의 보수적 감수성을 공격했다. 그들의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가 신체의 변형이나 훼손 ― 가령 루이 브뉘엘 감독의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에는 사람 눈동자를 면도날로 긋고, 구멍 난 손바닥에서 개미떼가 기어 나오는 장면 등이 있다 ― 이었다. 이 사회에서 신체는 신성하게 여겨지는 동시에 상품으로 취급될 만큼 멸시받는다. 이렇게 이중적이고 자기모순적인 신체는 따라서 사회의 모순, 분열, 위선 등을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예술 소재다.
〈마터스〉의 신체 훼손 이미지들은 싸구려 스플래터 영화들과 달리 대체로 독창적 ―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면서도 기이하게 아름답다 ― 이고, 분명한 맥락이 있기에 공포의 감정을 고급스럽게 고양시킨다. 위선적인 사회가 금기시하는 것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 주어, 삶의 다른 이면을 드러내는 신체 훼손 이미지의 초현실주의적 전통, 즉 스플래터 영화 본래의 미덕이 살아 있다.
〈마터스〉가 볼 만하다고 느끼는 비위 강한 독자들에게 조지 로메로 감독의 전설적인 좀비 스플래터 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권한다. 이 영화는 영화적 독창성과 사회비판적 시선이 한데 어우러진 품격 높은 고전 걸작이다.
고전이 고리타분하다면 〈디센트〉(2005)를 권한다. 동굴탐사를 떠난 여성 6명이 괴물들을 만나 피범벅의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인데, 공포영화의 교과서라 불려도 과하지 않을 만큼 탁월한 수작이다.
우원석 _ 영화감독 /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지금 작품을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