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택 칼럼:
최시중의 발언들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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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진상을 빚으며 미디어법이 날치기된 지 벌써 두 달째. 많은 시민·학생 들이 폭염을 피해 흩어진 사이 미디어계 곳곳에서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짝짓기가 한창이다.
여기저기 들이대는 자 조중동이요, 이미 방송면허를 손에 쥔 듯 행세하는 그들의 일차적 교미 대상은 국내자본이다. 거대 통신자본과 대기업, 심지어는 지방의 중소기업들에 이르기까지 웬만큼 돈이 돈다는 곳에선 어김없이 조중동의 유혹과 협박 풍문이 흘러나오고 있다(물론 외국계 미디어자본에 대해서는 훨씬 더 저자세로 구애한다지만 …).
그러나 조중동의 종합편성채널 만들기는 결코 그들만의 외로운 작업이 아니다. 방송위원장이라는 든든한 매파가 “낳기만 하면 양육은 우리가 책임진다” 하고 온갖 특혜를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모든 케이블TV가 의무적으로 그것을 내보내도록 해 줄 것이며(의무 재송신), 현재 홈쇼핑 채널들이 사용하고 있는 KBS·MBC·SBS 사이의 8번과 10번을 배정해 줄 것이고(황금채널 배정), 각종 세제혜택(방송장비 도입 시 면세, 수익금 중 방송발전기금 징수 면제 등)도 제공하고, 내용 심의와 편성규제(교양 프로그램 편성비율, 국내산 콘텐츠 편성비율)도 더 풀어 주겠다는 것이다.
한국 방송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음을 뻔히 알기에, 이번 경제 위기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수익 전망이 서지 않아 주저하고 있는 자본가들에게 어서 들어와 몸을 섞으라는 재촉이다.
1990년 그 말 많고 탈 많았던 SBS의 탄생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그때는 그래도 이렇게 공익에 위배되지 않게 하겠다, 저렇게 규제하겠다며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척은 했었건만 …. 최시중은 말한다. “처음 출범하는 방송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지 않느냐”고. 그래서 조중동 채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고. 맘놓고 장사하게 해 주겠다고.
반면 MBC와 KBS에 대한 최시중의 발언은 완전히 다른 톤이다. KBS 이사회와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를 파란색 ─ 한나라당 로고와 삼성의 색 ─ 으로 덧칠하고는 곧바로 “엄기영 사장의 진퇴를 포함해 방문진이 소신있게 해 나가라”며 MBC에 겁박의 끈을 좼다.
엄 사장 체제를 흔들어 MBC 내부의 위축과 분열을 유도하려는 포석을 깔고 KBS에 대해서는 이른바 ‘탈색론’을 들고 나섰다. “KBS를 틀면 색깔이 없는 뉴스를 접할 수 있게 하겠다”고. 이미 권력에 대한 비판기능을 거의 제거한 KBS를 정권과 자본의 발표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도구로 삼겠다는 뜻이요, 그들에게 불리한 사안들에는 기계적 중립·양시양비론을 사용해 여론을 호도하는 장치로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KBS를 EBS와 묶어 공영그룹화하겠다”, “(MBC의 민영화를 전제로) 3개 민영 지상파방송의 경쟁체제가 바람직하다”고까지 나아갔다. 그 전체적인 의미는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알 터. 예의 공영방송법 ─ 공영방송은 전체 수입의 20퍼센트까지만 광고로 조달해야 한다는 규정을 제정해, KBS는 수신료를 인상해 주는 대신 EBS와 묶어 관영화하고, KBS2의 광고를 떼어내 조중동채널이 먹고 살 광고물량을 확보해 주며, 현실적으로 광고를 포기할 수 없는 MBC를 자발적 민영화로 내모는 내용 ─ 이라는 노림수를 구사할 계획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 민영방송들에게 수익에 유리한 민영 미디어랩 설립을 허가해 줌으로써 MBC의 자발적 민영화를 유도하며 지역 MBC와의 분열을 획책하는 ─ 민영 미디어랩 허용이라는 꼼수를 가시화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꿈꿔 왔던 보수일변도의 1공영 다민영 체제를 기필코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온갖 특혜로 무장한 조중동 종편채널이 앞장서고, 울며 겨자먹기로 민영화해 날개가 꺾인 MBC가 합류하며, 수신료 인상에 목이 매인 관영KBS가 든든하게(!) 뒤를 받치는 semi-America형 여론독과점 체제. 최시중 발언들의 지향점은 바로 그것이다.
미국식 미디어 시스템 구축하기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라. 미국 미디어계의 실상이 과연 어떠한가?
미국의 미디어계를 지배하는 것은 5~6마리의 공룡이다. CNN, 〈타임〉지와 〈포춘〉, 워너브러더스 등을 소유한 타임워너, ABC, ESPN, 히스토리채널, 월트디즈니 영화사 등을 소유한 디즈니, 폭스TV와 디렉TV, 〈워싱턴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21세기 폭스(영화사)를 지배하는 뉴스코퍼레이션, CBS TV, MTV, 파라마운트와 드림웍스 등을 거느린 비아콤, NBC 네트워크를 소유하고 있는 GE(제너럴일렉트릭) ….
그중 의제설정 면에서 이 거대 사적독점체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악명 높은 글로벌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뉴스코퍼레이션이다. 〈Outfoxed: Rupert Murdoch’s War on Journalism〉이라는 다큐멘터리(최근 국내에서 Anti Fox라는 이름으로 소개됐음)에서 드러났듯 그 거대한 극우편향 선동기계는 “공정하고 균형잡힌”을 구호로 내세우며 진보 또는 자유주의적 인사들을 턱도 없이 흠집낸다.
주요 의제에 대해서는 경영진이 보도지침을 하달하고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직원은 징계를 받거나 해고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기괴한 사건들과 선정적 장면들을 극우적 선동과 버무려대는 폭스뉴스의 시청률이 CNN의 갑절이나 된다. 공영방송 PBS의 시청률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 시청자들은 끌끌 혀를 차고 욕하면서도 폭스뉴스를 보고, 폭스가 설정한 의제들이 다른 채널 뉴스의 준거가 된다.
이런 시스템에서 미국 사회의 소통이 질식됐고, 여론은 퇴행일로를 걸었다. 그 결과 이라크에서 단 한 개의 대량살상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국제적 상식을 미국인 상당수가 여전히 모른다.
엔론, 월드컴 사태로 금융자본의 탐욕과 사기가 기승을 부려도 미국 언론들은 아무런 경고도 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증시와 부동산 시장을 부추기기 바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거품이 터진 후 서민들에게 고통이 전가되고, 월가 금융자본들에겐 혈세가 바쳐져도 변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 전 국민의 15퍼센트가 의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오직 제도권 밖의 언론들에서만 들을 수 있는 상황.
이것이 현 정권이 지향점으로 내세우는 미국 언론의 실상이다. 한 목소리로 친기업 가치를 옹호하며, (담세율이 유럽보다 훨신 낮은 수준임에도) ‘세금폭탄’ 공세에 동조해 사회보장제도들을 형해만 남게 하는 데 앞장 선 것이 바로 미국 미디어들의 한심한 현주소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최시중 발언은 날치기한 미디어법을 발판으로 한발 한발 미국식 미디어체제를 구축해 나가려는 일련의 수순을 시사한다. 방송위원장 최시중은 그 프로젝트의 조율자로서 하나하나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자연사 위기의 조중동을 구하고, 그들과 국내외 자본을 결합시켜 1987년 이후 방송민주화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집어 버리는 것.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제약 때문에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던 공영방송체제를 사실상 없애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최시중 씨가 말하는 1공영 다민영 (실질적으로는 1관영 = KBS, 다사영(多私營)= 조중동+대기업 채널, SBS, 민영MBC) 체제 구상이다.
조중동+대기업 채널들이 선봉을 맡고, 몇 년 후 재벌과 외국자본 들이 미디어계를 완전히 장악하도록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보수우익 정권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한다는 사악한 그림.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영웅으로 그려지며, 자본의 가치만이 드높이 찬미되고, 그에 따라 모든 사회개혁의 희망이 사라지는 절망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최시중 씨의 발언에 분노하며 다시 투쟁의 의지를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