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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석 영화칼럼:
〈불신지옥〉의 아쉬움

올 여름 극장에서 본 영화들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는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이다. 영화 제목도 촌스럽게 느껴졌고, 그저 그런 한국 공포영화가 아닐까 싶어 별 기대 없이 보았다. 솔직히, 당시 날씨가 너무 더워 극장의 에어컨이 그리웠고, 마침 딱히 볼 만한 영화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관람 도중 나는 예상치 못한 탄성을 내뱉었다.

여주인공 희진(남상미)은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며 대학을 다니는 고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지방에서 엄마와 함께 살던 어린 여동생 소진이 실종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급히 엄마의 아파트로 간 희진은 실종 신고를 하고 동생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동생의 자취를 쫓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희진은 동생이 신이 들린 영매였으며, 이런 동생을 둘러싸고 아파트 이웃 주민들 사이에 뭔가 괴이한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이웃 주민들이 하나씩 의문의 자살을 하며 사태가 꼬인다. 여기에, 기독교 광신도인 엄마의 기이한 행각도 의문투성이라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공포영화라기보다는 미스터리 영화에 가까운 〈불신지옥〉은 많은 미덕들을 가지고 있다. 꽤나 복잡한 이야기의 실타래들을 섬세하게 직조한 내러티브 솜씨가 인상 깊고, 배우들의 연기가 고르게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허름한 서민 아파트 공간과 하층 계급 캐릭터들을 윤기 있게 그린 점도 좋다. 또, 공포를 유발하는 영화적 장치들이 신선하고, 장면을 이루는 쇼트(Shot)들의 구성이 경제적이면서 창의적이다.

더불어, 한정된 공간을 영상에 담아내는 솜씨가 눈에 띈다. 적은 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엄마의 아파트와 그 주변으로 영화적 공간을 한정짓는다. 아마도 예산을 아끼기 위한 고육지책인 듯한데, 이렇게 제한된 공간만 보여 줄 경우 영상 이미지들을 다채롭게 보여주기가 보통은 힘들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같은 공간을 장면마다 다른 느낌으로 잘 묘사해 시각적인 단조로움을 너끈히 극복한다.

몇 가지 아쉬움도 있다. 먼저, 영화의 화두인 종교의 광기를 다루는 태도가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영화는, 예컨대 이런 광기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관객들의 상식에 도전하지 않는다. 대신, 광기의 사회적 원인인 하층계급 주인공들의 고단한 삶과 현실을 부각한다. 이런 광기가 알고 보면 이해할 만한, 슬픈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심 깊은 시선이지만, 새로울 게 없을 뿐더러 영화적으로는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균형감 있는 관점이라 좋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 균형감 때문에 영화의 날카로움과 감흥이 약해졌다(영화란 자고로 도발적이어야 제 맛이고, 그러려면 어느 정도 모나고 편파적이어야 한다. 이것저것 다 고려하는 균형을 추구하다 보면 도발적인 예리함을 잃기 십상이다).

다른 아쉬움은 영화 시장의 난폭한 현실이다. 〈불신지옥〉은 작지만 섬세하고 고급스런 상업영화다. 그런데 당시 함께 극장에 걸린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대량 홍보에 밀려 관객들에게 제대로 어필할 기회가 없었고, 결국 흥행하지 못했다. 배급사의 자금투입 규모에 크게 좌우되는 극장 사전예매율, 개봉 첫 주의 단기 성적으로만 개봉 지속 여부가 결정되는 퇴행적인 현실 등이 고급 상업 영화가 생존할 토대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래도 잘 만든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는 건 반갑고 행복한 기억이다. 인상적인 연출력을 보여준 이용주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덧붙여, 올 가을 가장 기대되는 영화는 10월 중순에 개봉하는 〈디스트릭트 나인〉이다. 나도 아직 안 봐서 장담이야 못하겠지만, 미국 개봉 평이 몹시 좋다. 장르는 SF인데, 외계인과 지구인의 갈등을 통해 인종, 계급 차별 등을 은유적으로 비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흥미롭게도 이 영화의 배경은 ― 대개 SF 영화의 장소가 미국인데 반해 ― 인종차별이 유독 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관람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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