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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외고 출신인 내가 외고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

요즘 외고 폐지 논란을 접하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두운 기억이 떠올라 새삼 내 폐부를 찌르는 듯하다.

나는 외고 안에서 힘겨운 10대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곳은 내게 말 그대로 ‘총성없는 전쟁터’ 그 자체였다. 학교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명문대 합격을 강조했고 철저하게 그것을 겨냥한 교육을 시켰다. 전공 외국어 공부는 언제나 그 다음이었다. (나는 러시아어 전공이었지만, 고3 때 러시아어 수업은 입시교육을 위해 파행적으로 진행됐다.)

모든 시험에서 동료 학생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사력을 다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등수가 사정없이 떨어지고 낙오자 취급 받는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오죽 경쟁이 치열했으면 이를 지켜 보는 교사들조차 “너희는 네 옆의 친구가 죽어 줬으면 좋겠냐”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3년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친구들을 입시경쟁의 ‘보이는’ 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우리 마음을 시나브로 지배한 셈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심성이 하루하루 망가져 가는 건 당연했다. 어느날 미술시간에 특정한 주제 없이 작품을 만들어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발표한 작품 모두가 소외, 두려움, 외로움 등 자신의 억눌린 심정을 토로하는 것 일색이었다. 보다 못한 미술교사가 발표를 중단시켜야 했다.

내가 어쩌다 시험에서 점수가 떨어질 때, 등 뒤에서 나를 흉보며 좋아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고 가까스로 분을 참은 게 몇번인지 모르겠다. 하긴, 나 또한 수능을 망치고 울먹이는 친구를 위로하기는커녕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다’ 하고 생각할만큼 심성이 뒤틀려 버렸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

우리 학교 주변에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아 우리는 자조적으로 학교를 ‘안개 낀 바스티유 감옥’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데 내가 ‘바스티유 감옥’을 ‘출소’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여전히 그 감옥엔 자발적으로 들어 가려는 ‘재소자’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이것은 내게 승자와 패자 모두를 지옥으로 몰아 넣는 치킨게임으로만 보인다.

지금 진짜 감옥에 갇힌 내가 바라건대, ‘안개 낀 바스티유 감옥’은 이제 이 땅에서 사라졌으면 한다. 그래서 여전히 숨막히는 입시경쟁·줄세우기에 고통받는 학생들이 잠시나마 숨 돌릴 기회라도 얻으면 좋겠다. 다만, 그것은 지금 외고 문제에 대해 기만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명박 정권에 맞선 도전과 결합해야 실현 가능한 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