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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석 영화칼럼:
젊은 영화

지난 칼럼에서 〈디스트릭트 9〉을 기대작으로 추천한 뒤 불안했다. 해외 영화평들이 좋아도 보지도 않은 영화를 권하는 건 도박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며 영화를 보았는데 다행히 역시나였다. 영화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정치적으로도 의미 있고 장르적으로도 재미있다.

외계인 이주민들이 격리수용되고 차별 당한다는 가상 설정을 통해 인종 문제를 풍자한 SF 영화 〈디스트릭트 9〉은 패기 넘치고 대담하다. 29살 먹은 젊은 감독 닐 블롬캠프는 신선한 발상, 진솔한 사회비판, 속도 빠른 이야기 전개와 거친 촬영 등으로 새로운 감흥을 만들어낸다. 영화적 허점들이 가끔 눈에 띄지만 감독은 시치미를 뚝 떼고 정면 돌파한다. 가령, 외계인의 기술을 탐내는 외계인 관리 회사가 기술의 보고인 거대 우주선을 20년 넘게 허술하게 방치했다는 점도 말이 안 되고, 내레이션 구실을 하는 먹큐멘터리(Mockumentary : 가짜 다큐멘터리) 인터뷰 장면들도 때로 감독의 편의대로 삽입되어 형식적 완성도를 해친다. 하지만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도대체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젊음과 패기로 무장한 영화는 구차하게 허점들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직 이야기의 큰 흐름과 핵심 정서를 뚝심 있게 강조해 스크린 속 리얼리티를 기어코 긍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젊은 영화에 아쉽게도 노인네 같은 대목이 있다. 예컨대, 주인공 비커스는 소심하고 허약한 남자인데, 영화 끝 무렵엔 외계인의 무기를 이용해 악당들과 싸우는 강한 남자로 변신한다. 이런 변신, 즉 소심, 허약, 결격 사유가 있는 남성이 수퍼 파워를 획득해 강한 남자로 거듭나는 것은 수많은 영화들에서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낡은 모티브다.

환골탈태

이런 모티브를 가장 노골적으로 사용한 영화는 제목조차 직설적인 〈슈퍼맨〉(1978)이다(〈슈퍼맨〉을 부정적으로 언급하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이 영화를 만든 리차드 도너 감독을 정말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유치한 스토리라도 영화적으로 멋지게 가공해낼 줄 아는 헐리우드의 진정한 장인이다). 슈퍼맨은 하늘을 나는 초인이지만 평소에는 소심, 허약한 (척하는) 이중적 존재다. 그리고 이 이중성이 교차하는, 즉 허약한 남자에서 강한 남자로 변신하는 순간이야말로 이 영화의 또 다른 클라이맥스다. 슈퍼맨이 공중전화 부스에서 고리타분한 양복 ― 허약한 남자의 허물 ― 을 벗고, 근육질의 쫄티 몸매를 드러내는 환골탈태 장면들을 보라. 거기야말로 관객들의 환호가 가장 크게 쏟아지는 대목들이다.

이런 변신 모티브는 사실 유아적이다. 소싯적 동네 깡패에게 ‘삥’ 뜯길 때 흔히 떠올리는 유치한 상상, 즉 힘센 이로 변신해 깡패를 혼내주는 어리숙한 공상 같은 수준의 상상력이다. 게다가 편향적인 남성성에 기초를 둔 발상이다. 남자란 자고로 주먹 좀 쓸 줄 알아야 멋지다는, 쉬운 선입견에 기댄 생각이다. 〈디스트릭트 9〉은 이런 유아적, 편향적 판타지를 넘지 못한다. 장르 영화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만, 어쨌든 영화의 혈기왕성함이 인상적이었던 터라 낡아 빠진 남성 변신 모티브를 되풀이하는 대목이 더 진하게 아쉽다.

진정 모든 면에서 패기 넘치는 젊은 영화를 보고 싶은 독자들에겐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셀레브레이션〉(1998)을 권한다. 주인공 크리스찬은 아버지의 생일 파티에 참가한다. 부와 권력을 가진 부르주아지 아버지의 생일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분위기가 성대하다. 그런데 크리스찬은 준비된 반란을 실행한다. 어릴 적 크리스찬과 그의 누이를 학대, 강간한 폭군 아버지와, 교양 넘치는 귀부인 행세를 하는 위선적인 어머니의 과거 등을 폭로하며 파티를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일단 싸움이 시작된 이상 어떤 망설임도 치명적이다. 그는 늙은 여우 같은 부모와 비타협적인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셀레브레이션〉은 형식적으로도 대담하고 호기롭다. 쓸데없이 비싸고 비대한 현대 영화 테크놀로지와 속빈 강정 같은 고전 영상미학 등을 깡그리 부정하고 공격하기로 작심한 감독은 일체의 조명 장비 없이 조악한 비디오카메라로 단 일주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결과는 환상적이다. 직접 확인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