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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택 칼럼:
헌재, 최후의 심판자?

삼류 권투중계의 추억

TV 생중계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건 어린 시절 본 권투 중계방송이었다. 수십 년 전 장충체육관 특설 링에서 벌어지던 그 경기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죄었던가. 하지만 판정결과가 발표될 쯤엔 거의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 선수가 다운만 안 당했으면 승패는 보나마나였고, 설사 다운을 당하고 일방적으로 몰렸더라도 현역 챔피언이면 십중팔구 손이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심판 3명 중 한 명이 먼저 상대 선수를 호명해 긴박감을 자아내고는(0:1), 곧이어 다른 한 명이 상당한 점수 차로 한국선수의 우위로 판정하고(1:1), 마침내는 마지막 한 명이 근소한 차이로 한국선수에 우세(2:1)를 주거나 무승부를 선언하는 패턴. 그 시절의 판정은 으레 그랬고, 본인도 멋쩍어하면서 시퍼렇게 멍이 들고 코피가 터진 한국 선수의 손이 올라가곤 했다.

이따금 상대 선수(주로 동남아 출신이었는데)가 판정에 항의라도 하거나 관중들이 야유를 보낼라치면,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나서서 “그래도 일단 판정이 났으면 승복하는 게 선수의 도리이자 페어플레이 정신”이고 “홈 어드밴티지는 어디에도 있는 것”이라며 서둘러 중계방송을 끝냈다. 억울하면 지네 나라에서 하거나 KO로 이겨야 하는 법이라는 교훈(!)을 남겨 준 그 시절의 심판들은 다음 경기에서도 계속 심판을 보았다.

‘혹시나’와 ‘역시나’

절차상 하자는 있지만(0:1), 중대하거나 결정적이지 않고(1:1) 삼권분립 원칙이 있으니 국회가 알아서 하면 된다(2:1)는 왕년의 권투심판급 지혜(?)를 두고 무성한 말과 패러디가 오간다. 하여 거기에 몇 마디 덧붙여 봤자 무용할 것이기에, 나는 오히려 되묻고 싶다. 바로 그 모습이야말로 헌재의 본색이 아니었던가?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헌재의 판결에 모든 것을 맡기는 듯한 모양새가 내심 찜찜하고 불안하면서도, 워낙 명백한 절차상의 하자가 있었기에 혹시나 했던 것 아닌가?

관습법이라는 해괴한 논리까지 동원해 수도 이전을 저지하고, 종부세를 무력화하며, 모호한 ‘국가적 현실’을 고려해 끝내 국가보안법을 살려냈던 보수의 성채로부터, 군사독재 시절부터 판검사 경력을 닦아 왔으며 그 중 극히 일부만이 자유주의 정권의 지명을 받았던 그들에게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한 것 아닐까? 돌아보면 ‘정치적’ 결정을 미리 내려 놓고 그것을 정당화할 논거를 여기저기에서 짜맞추는 것을 되풀이하는 게 그들의 판결방식이었다. 대중의 직접행동이 분출할 기미가 보이면 그 요구들 중 일부를 수용하는 전향적(물론 자유주의적 틀 내에서이지만) 판결을 내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유지시키며, 대중의 직접행동이 퇴조 기미를 보이면 즉각 기득권 세력의 등기소로 간판을 바꿔다는 것이 그들의 행태였다. 모든 것을 전횡하는 청와대와 행정관료들, 검찰과 경찰과 국정원과 군대로 이루어진 억압장치들, 교회와 학교와 언론 등 이데올로기 장치들, 재벌이라는 이름의 거대 경제권력들로 이루어진 기득권의 성채 꼭대기에 내걸린 깃발이 절차적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요, 그 상징적 장치로 작동해 온 것이 바로 헌법재판소였다. 그것이 이른바 ‘87년 체제’였음을 우리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엄밀히 말해 투쟁의 객관적 조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미디어 악법에 대한, 조중동 방송에 대한, 수구세력의 방송장악에 대한 반대여론은 여전히 60퍼센트를 넘는다. 대중은 결코 ‘헌재스럽지’ 않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벌써 지쳐 있고, 기회주의적 야당이 한사코 의회주의의 틀을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는 점일 뿐이다. (헌재는 바로 이 약점을 보고 기득권세력의 손을 들어주었으리라.)

따라서 새 방송사업자 선정이 진행되고, 예고된 악몽들이 차례차례 현실이 되기 시작한 지금 전선이 시급히 복구돼야 한다. 진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 초등학교 반장 선거보다 못한 저질 사기극을 끝장내는 싸움,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를 전면화하는 정의의 싸움이 다시 시작돼야 한다.

최후의 심판자는 저들 노회한 사법기술자들이 아니라 대중이요, 민중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