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여전히 유효한가?: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을 걷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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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내내 죽은 개 취급을 받았던 칼 마르크스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1998년에 〈파이낸셜 타임스〉나 〈뉴요커〉 같은 주류 언론의 논평가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기사들을 썼다. 〈가디언〉의 경제면은 거의 매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빌 클린턴의 유명한 말,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클린턴이 조지 부시 1세를 비꼬아 한 말 ― 옮긴이]라는 말이 마르크스의 부활을 설명해 준다. 세계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1990년대 전반기에 마르크스는 무시당했다. 세계 경제가 점차 심각한 문제에 빠져들고 있는 지금, 마르크스의 저작이 다시 빛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마르크스의 부활에는 음험한 부분도 많다. 지금 마르크스가 각광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마르크스 사상의 실체는 대개 폄하되고 있다. 그래서 〈가디언〉의 빅토르 키건은 1999년 1월 초에 마르크스와 일 대 일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서도,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시장 체제의 탄력성에 경악했을 것이다. 시장 체제는 또 다른 위기에서도 살아남은 것처럼 보인다.” 하고 썼다.
사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를 무시하는 말의 이면에는 마르크스 사상의 본질에 대한 매우 끈질긴 일련의 신화가 숨어 있다. 이들 중의 어떤 것도 새롭지 않다. 그 대부분은 1세기 전에 마르크스의 초기 비판에서 정식화된 것들이다. 그러나 교육 체계와 여론 매체는 그런 신화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교육 수준이 높고 현학적인 영역일수록 더 그렇다. 그런 것들은 내가 말하듯이 신화일 뿐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진정한 내용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다.
신화 1 : 빅토리아 시대의 계급 개념
〈공산주의자 선언〉 이래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극소수 자본가들과 다수 노동자들로 분열해 있다고 묘사했다. 모든 경제력이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돼 있는 반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회학자들은 현대 사회가 마르크스의 묘사와 다르다고 말한다. 적어도 영국 같은 나라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공장에서 고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분야의 화이트 칼라 직종에 종사하는 중간 계급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을 완전히 오해한 데 기초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한 사람의 생활방식이나 직업, 심지어 소득으로 계급을 정의하지 않았다. 개인의 계급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가 생산 수단과 맺고 있는 관계다. 생산 수단은 토지·건물·기계 같은 생산적 자원으로, 이것이 없다면 생산 활동은 아예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은 이런 생산적 자원을 통제할 수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예외가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 즉 노동력이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서 이 노동력을 자본가들에게 팔아야 한다. 자본가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 덕분에 생산 수단을 통제할 수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협상에서 상대적 약자인 노동자들은 불리한 조건으로 노동력을 판매한다. 그들은 관리자와 기업주 들의 강력한 통제 하에 일을 하면서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이 때문에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으로부터 이윤을 뽑아낼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계급은 사회적 관계다.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공장이 아니라 사무실, 수퍼마켓, 병원에서 일을 하더라도 노동자가 될 수 있다. 모종의 화이트 칼라 직종에서 일하는 것도, 교사나 햄버거 가게 점원처럼 물질적 재화 생산이 아니라 서비스 생산을 돕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영국 같은 나라에서 노동인구의 대다수는 따라서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학자들에게는 불만스럽겠지만, 실제로 여론 조사를 보면 다수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노동 계급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화 2 : 임금철칙설
마르크스는 또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 계급이 점차 빈곤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비난도 받는다. 가끔 마르크스가 대중의 “점차적 빈곤화”를 예측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얘기다. 그러나 지난 1백여 년 동안 선진국들의 실질 임금이 실제로 상승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틀렸음이 분명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놀라운 왜곡이다. “임금철칙설”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물리적 생존의 최저 수준 이상으로 상승할 수 없다. 이 임금철칙설은 19세기 정설적 자본주의 옹호 경제학의 주요 도그마 중 하나였다. 그 기초는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이었다. 맬서스에 따르면, 인구는 식량 생산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생존 수준 이상으로 임금이 상승하면 인구 성장이 촉진돼 대중이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이론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이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고 다른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이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다. 〈임금, 가격, 이윤〉이라는 책에서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의 한 추종자가 편 주장을 논박했다. “임금철칙설”에 따라 그 추종자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조건을 결코 개선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생산물이 노동과 자본 사이에 배분되는 것은 양측의 세력 저울에, 따라서 계급 투쟁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진실은 마르크스가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실질 임금이 상승하더라도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노동 생산물의 몫은 기업주들이 이윤의 형태로 가져가는 몫에 비해 하락할 수도 있다. 노동자들의 노동 생산성이 더 높아진다면 그들의 생활 수준은 상승할 수 있지만, 기업주들이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더 많이 착취당하는 것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또 노동조합이 얻어 낼 수 있는 개혁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생산수단을 기업주들이 통제하므로 그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경기 침체기에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도 높은 실업률 때문에 노동강도 강화, 저임금, 노동조건 악화 등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난 25년 간의 경제 위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의 실질 임금도 상당히 하락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틀렸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신화 3 : 자본주의 붕괴 불가피론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경제적 모순 때문에 불가피하게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느냐고 비판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그렇게 붕괴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금 마르크스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의 위대한 저작 〈자본〉에서 경제 위기 이론을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경제학자 메이너드 케인스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마르크스는 시장 경제가 적절하게 조직된다면 모든 자원이 충분히 사용되는 균형점에 이를 것이라는 견해 ― 여전히 주류 경제학의 핵심일 뿐 아니라 오늘날 고든 브라운[영국 재무장관: 옮긴이]이 떠들어 대는 ― 를 논파했다. 그는 또 자본주의의 근저에는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아넣는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율의 저하 경향이다. 투자한 결과로 자본가들이 얻는 수익을 보여 주는 이윤율은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을 측정하는 주요 지표다. 그러나 기업주들은 내부적으로 분열해 있는 계급이다. 그들은 노동자들로부터 뽑아 낸 이윤을 저마다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
개별 자본가들은 시장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개선된 생산 방식에 투자한다. 그들의 경쟁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투자, 특히 기계류에 대한 투자가 노동력에 대한 투자보다 더 빠르게 증가한다. 그러나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들의 노동이다. 따라서 이윤의 양은 투자한 양보다 더 천천히 증가하고 따라서 이윤율은 하락한다. 전반적인 이윤율이 일정 수준 밑으로 내려가면 새로운 투자는 중단되고 경제는 위기로 빠진다.
그러나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은 오직 경향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을 반등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상쇄 요인들”을 지적했다. 사실, “일반적인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낳는 바로 그 요인들이 이런 저하를 방해하고 지연시키고 부분적으로 마비시키는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위기 자체다.
경제 위기 때 기업들은 파산하고 그들의 자산은 헐값에 팔린다. 이것은 자본의 총액을 감소시킨다. 그와 동시에, 앞서 보았듯이 노동자들은 실업의 압력 때문에 착취의 강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요인들은 투자와, 따라서 성장이 다시 시작되는 수준까지 이윤율이 회복되는 데 일조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영원한 위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윤율의 부침은 자본주의를 호황과 불황의 순환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것을 분석한 최초의 인물이다. “경기 순환”의 하강 국면은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준다. 체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계급 투쟁은 더 치열해지고 격렬해진다. 이런 양극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를 타도하겠다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노동 계급이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반드시 경제적으로 붕괴한다는 말은 아니다.
신화 4 : 경제 결정론
마르크스 경제 이론을 이렇게 왜곡하는 것은 그의 사상에 대한 더 큰 오해의 일부다. 마르크스를 경제 결정론자로 묘사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다. 그가 역사적 변화는 생산력 발전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더 특정하게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자체가 필연이라고 생각했다는 비판이다.
분명히 마르크스주의 전통에는 오점이 있다. 특히 마르크스가 죽은 뒤에 등장한 제2인터내셔널 소속 사회주의 정당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그랬다. 필연적인 경제 법칙에 따라 역사가 발전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를 때때로 뒷받침하는 듯한 마르크스의 일부 공식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사상의 요체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 유명한 구절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상황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물려받거나 우연히 마주친 특정 상황에서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물질적 조건이 인간을 제약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제약들이 그들에게서 선택권이나 주도성을 박탈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계급 사회의 거대한 위기는 언제나 “사회의 혁명적 재구성이나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로 끝났다고 썼다. 다시 말해, 위기는 대안을 제기하는 것이지 미리 정해진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중요한 경제 위기에 노동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가는 그들의 객관적 상황뿐 아니라 집단적 조직의 힘,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그들을 지도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정당들에도 달려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와 그 정치적·법률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구분했다. 그는 전자가 사회 생활의 “실제적 기초”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그가 상부구조를 있으나마나 한 것으로 여겼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위기의 시기에 상부구조 ― 마르크스가 썼듯이 “인간이 이 갈등을 의식하고 그것을 투쟁으로 해결하는” 영역 ― 에서 벌어지는 일이 [위기의] 결과를 좌우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신화 5 : 국가사회주의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는 국가가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모든 사람의 생활을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규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므로 1980년대 말 스탈린주의 사회들의 붕괴는 마르크스 자신의 사회주의 개념에 내포된 결함의 직접적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마르크스의 진정한 견해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는 용어 자체부터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자유는 국가를 사회 위에 군림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회에 완전히 종속되는 기관으로 바꾸는 데 달려 있다.” 하고 썼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 관한 저작들에서 자본에 이롭게 사회를 옥죄는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의 성장에 대한 분노를 나타냈다. 그는 1871년의 파리 코뮌이 바로 “국가 자체에 맞선 혁명”이라며 환영했다. 그는 파리 노동자들이 관료적 국가 기구를 해체하고 그것을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직접 통제하는 공공 기관들로 대체한 것을 찬양했다.
마르크스는 일부 개명한 엘리트가 민중에게 사회주의를 강요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노동 계급의 자기 해방”, 즉 평범한 사람들이 민주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소수 자본가 착취자들한테서 권력을 찬탈하고 스스로 해방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권력이 사회 상층에 거대하게 집중된 스탈린주의 사회들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개념과 정반대였다. 그런 사회들이 붕괴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사상이 타당성을 잃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들에서 불평등과 불합리라는 전염병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지금이 바로 마르크스에게 되돌아갈 때다. 이 글에서 논박한 신화 속의 마르크스가 아니라 진정한 마르크스, 즉 기존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인간 해방이라는 대안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