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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전투’ 10주년:
대안세계화 운동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교훈

1999년 11월 30일 시카고 WTO 정상회담이 열리는 워싱턴 주 무역센터. 전 세계 정부 각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회담장 밖에서는 시위대 5만 명이 도로를 점거하고 반WTO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들이 도로를 장악하면서 어떤 정상들은 아직도 회담장에 입장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며칠 뒤, WTO 회담이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선진국 각료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회의장을 속속 나서기 시작했다. 운동이 ‘시애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역사의 종말’을 뒤로 하고 다시 거리로

1980년대 운동의 패배 경험이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운동이 ‘정체성의 정치’, 혹은 ‘단일 쟁점’ 운동으로 파편화된 동안에는 대처주의·레이건주의 등 신자유주의 개악에 반대하는 대규모 저항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동유럽 국가자본주의 정권이 붕괴하자 1989년 미국의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자유시장 체제 ― 신자유주의 ― 말고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운동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먼저, 1994년 1월 1일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사파티스타가 멕시코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 멕시코 대통령은 부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출범을 축하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5년 프랑스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악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큰 파업 중 하나였다. 노동자 2백만 명이 한 달 동안 파업을 벌였고 무려 5백90만 일의 작업 손실을 입히면서 우파 정부와 사장 들을 굴복시켰다. 〈르몽드〉는 이 파업을 “세계화에 반대하는 최초의 투쟁”이라고 불렀다.

분산됐던 운동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1998년 아딱(‘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이, 미국에서는 ‘50년이면 충분하다’[IMF와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 창설 50주년에 항의하는 의미에서]나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가 결성됐다. 또, 노엄 촘스키, 아룬다티 로이, 하워드 진, 피에르 부르디외 등 현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로 보는 사상가들의 책이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시애틀 전투’

1999년 11월 시애틀 WTO 정상회담을 앞두고 다양한 단체들이 결집했다. AFL-CIO를 포함한 노동 단체, 주빌리2000 같은 제3세계 부채 탕감 요구 단체, 지구의 벗 같은 환경 단체, 직접행동네트워크(DAN) 같은 아나키스트들의 연합,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광범한 반WTO 연합체에 참가했다.

다양성과 급진성의 조화를 이뤘던 1999년 시애틀 시위

당연히 이 많은 단체가 동일한 목표와 전략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한 가지 목표에서 일치했는데, 기업 주도의 세계화가 대안이 될 수 없고 다 함께 힘을 모아서 그것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WTO는 전 세계 민중의 복지와 생활수준 등 모든 소중한 것들을 무시하고 오직 민간 기업의 이윤 창출에만 신경을 씁니다”라는 ‘지구의 벗’ 조직자의 말은 당시의 공통적 정서를 잘 표현한 것이었다.

이들의 단결을 촉진시킨 또 다른 요소는 경찰 폭력이었다. 경찰은 곤봉, 최루탄, 섬광탄, 고무총 등을 사용했고 6백 명을 연행했다. 이에 맞서는 과정에서 반WTO 시위대는 눈부신 단결력과 연대정신 ― ‘팀스터[미국 운수노조]와 거북이[환경 단체의 상징]는 함께 한다’는 구호로 표현된 ― 을 보여 줬다.

초강대국의 심장부에서 승전보를 안겨준 시애틀 전투는 이후 전 세계 운동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한 활동가는 시애틀 전투가 자신에 미친 영향에 대해 2005년에 이렇게 말했다. “시애틀 전투는 폭탄이 폭발한 것과 같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운동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처음으로 얻었습니다 … 처음으로 전 세계적 파장력을 가지는 투쟁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세대의 68혁명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전에는 1994년 사파티스타 항쟁이나 1995년 프랑스 총파업을 서로 독립된 사건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시애틀 전투 이후 저는 그들이 모두 연관된 운동의 일부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대안세계화’ 운동

시애틀 전투 이후 탄생한 운동을 주류 언론들은 ‘반세계화 운동’이라 불렀다. 이것은 운동에 참가한 다수 사람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 운동은 국제적이었고, 고립주의적 대안을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래서 곧 이 새로운 운동의 성격을 정의하기 위한 다양한 용어들 ― ‘대안세계화 운동’, ‘반자본주의 운동’, ‘지구 정의 운동’,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운동’ ― 이 등장했다.

미국의 대안세계화 운동은 2001년 9·11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침략 전쟁 반대로 의제를 확대하면서 더 발전했다. 2003년 2월 15일 수천만 명이 함께한 전 세계 반전 행동은 대안세계화 운동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약점이 있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발전이 정체했다. 먼저, 운동의 목표 ― ‘반신자유주의’ ― 에서 모호함이 있었다. 단지 신자유주의 정책 반대에 머무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낳은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이것은 이질적인 정치적 성향 ― 크게 보아 다수의 개혁주의와 자율주의자, 소수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 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문제는 운동 내 개혁주의적 우파 지도자들이 (때때로 자율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 운동의 더한층 급진화를 가로막거나, 기존 주류 정치 세력과 타협하면서 우경화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노동자 계급투쟁의 부양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었다(이것이 두 번째 약점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체 상태가 영원할 거라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이번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는 결정타를 맞았고, 그들의 실천은 경제를 ‘불안정한 안정 상태’ 이상으로 호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시애틀 전투 이후 눈부신 투쟁을 보여 줬던 사람들이 고통을 계속 참을 거라 생각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투쟁을 고무하고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개입이다. 시애틀 전투 승리 10주년을 축하하면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성취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곱씹을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