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전투’ 10주년:
대안세계화 운동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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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30일 시카고 WTO 정상회담이 열리는 워싱턴 주 무역센터. 전 세계 정부 각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회담장 밖에서는 시위대 5만 명이 도로를 점거하고 반WTO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들이 도로를 장악하면서 어떤 정상들은 아직도 회담장에 입장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며칠 뒤, WTO 회담이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선진국 각료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회의장을 속속 나서기 시작했다. 운동이
‘역사의 종말’을 뒤로 하고 다시 거리로
1980년대 운동의 패배 경험이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운동이
이런 분위기에서 동유럽 국가자본주의 정권이 붕괴하자 1989년 미국의 후쿠야마는
먼저, 1994년 1월 1일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사파티스타가 멕시코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 멕시코 대통령은 부미자유무역협정
분산됐던 운동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1998년 아딱
‘시애틀 전투’
1999년 11월 시애틀 WTO 정상회담을 앞두고 다양한 단체들이 결집했다. AFL-CIO를 포함한 노동 단체, 주빌리2000 같은 제3세계 부채 탕감 요구 단체, 지구의 벗 같은 환경 단체, 직접행동네트워크

당연히 이 많은 단체가 동일한 목표와 전략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한 가지 목표에서 일치했는데, 기업 주도의 세계화가 대안이 될 수 없고 다 함께 힘을 모아서 그것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단결을 촉진시킨 또 다른 요소는 경찰 폭력이었다. 경찰은 곤봉, 최루탄, 섬광탄, 고무총 등을 사용했고 6백 명을 연행했다. 이에 맞서는 과정에서 반WTO 시위대는 눈부신 단결력과 연대정신 ―
초강대국의 심장부에서 승전보를 안겨준 시애틀 전투는 이후 전 세계 운동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한 활동가는 시애틀 전투가 자신에 미친 영향에 대해 2005년에 이렇게 말했다.
‘대안세계화’ 운동
시애틀 전투 이후 탄생한 운동을 주류 언론들은
미국의 대안세계화 운동은 2001년 9
그러나 이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약점이 있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발전이 정체했다. 먼저, 운동의 목표 ―
문제는 운동 내 개혁주의적 우파 지도자들이
그러나 이런 정체 상태가 영원할 거라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이번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는 결정타를 맞았고, 그들의 실천은 경제를
문제는 투쟁을 고무하고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개입이다. 시애틀 전투 승리 10주년을 축하하면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성취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곱씹을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