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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1999년 시애틀, 세계적 운동이 탄생하다

10년 전 1999년 11월 30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이 몰아닥친 대규모 시위대 때문에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정상회담은 마비됐다. 노조원, 환경 운동가, 제3세계 부채 탕감 활동가 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유무역 추진이 세계에 미치는 파국적 영향을 비판했다.

회담장 바깥의 항의 행동뿐 아니라 정상들 간 내부 분열로 WTO 회담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흔히 반세계화 또는 반자본주의 운동 — 좀더 최근에는 대안세계화 운동 — 으로 불리는 운동이 탄생한 것이었다.

사실, 시애틀에서 탄생한 운동은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 말 스탈린주의 정권들의 붕괴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인 워싱턴 컨센서스와 온갖 개악들이 추진될 수 있는 분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조성됐다.

시애틀 경찰의 만행 ⓒ사진 Steve Kaiser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저항을 낳았다.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항쟁과 1995년 11~12월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이었다.

한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이 대중적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2000년에 두 권의 기념비적인 저서 — 나오미 클라인의 《노 로고》와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의 《제국》 — 가 출간됐다. 프랑스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신자유주의 비판을 전파하는 주요 매체가 됐다.

시애틀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분산된 저항과 비판 들을 하나의 운동으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다. 첫째, 신자유주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1989년 후 좌파들이 빠져 있던 비관주의를 약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둘째, 엄청나게 많은 저항 행동들을 한 자리에 모음으로써 시애틀 시위는 정치적 보편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이제 표적은 개별 정책이나 불의한 사건이 아니라 체제 자체였다.

시애틀 후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위한 회담에 반대하는 여러 전투와 동원 들이 있었고, 2001년 7월 제노바의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폭동 진압 경찰이 카를로 줄리아니를 살해한 것에 항의해 30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벌어진 2001년 9·11 공격으로 미국의 운동은 타격을 입었고 지금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네트워크들

그러나 운동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계속 성장했다. 2001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시작된 세계사회포럼(WSF)은 거대한 반자본주의 학교이자 의회였다.

2001년 제노바 시위를 조직했던 네트워크들이 2001년 가을 최초의 반전 시위를 조직하는 데 뛰어들었다. 영국의 전쟁저지연합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급진적 정신과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보여 줬다.

2002년 11월 제1차 유럽사회포럼(ESF)에서 동일한 급진적 분위기가 또 한 번 분출했다. 이 행사의 정점은 1백만 명이 참가한 반전 시위였다. 유럽사회포럼은 2003년 2월 15일 이라크 전쟁 반대 국제 공동 반전 행동을 호소하기도 했고, 그 다음해 WSF가 그 호소를 이어받았다.

2003년 2월 15일과, 3월 이라크 전쟁 발발 전후해 벌어진 반전 시위들은 대중 운동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규모였다. 한 연구를 보면, 2003년 1월 3일~4월 12일 사이에 3천5백50만 명이 2천9백78번의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2·15 행동은 대안세계화 운동의 정점이기도 했다. 저항 행동들을 급진화한 동력은 한동안 지속됐다. 2004년 1월의 [인도] 뭄바이 WSF는 초대형 반자본주의 축제였다.

금융 투기 규제를 주된 목표로 삼는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ATTAC, 아딱)은 2005년 6월 프랑스의 유럽헌법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질 것을 호소하는 캠페인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운동은 중요한 승리를 얻었지만 눈에 띄게 약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아딱은 치명적 분열을 겪었다.

운동 후퇴의 원인은 정치적이었다. 이 운동을 표현하는 이름이 다양하다는 것은 운동의 성격에 모호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체제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체제의 이름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자체인가 아니면 단지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인가?

국제 금융 거래에 토빈세 부과를 요구하는 아딱 캠페인의 목표는 좀더 규제된 형태의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고든 브라운이나 캔터베리 대주교 같은 주류 인사들도 토빈세를 지지하고 있다.

혼란

그래서 운동 내에서 다양한 정치 경향들이 나타났다. 아딱은 좀더 개혁주의적인 경향을 대표했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본주의를 타도하지 않고도 해방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자율주의자들과 비록 소수지만 대단히 활동적이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정당 참여를 공식적으로 배제한다는 WSF의 입장은 이런 차이를 해결하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실천에서 이것은 위선적이었다. 예컨대, 브라질 노동자당(PT) — 2002년 룰라의 당선 이후 집권당이 됐다 — 은 브라질에서 열린 모든 WSF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운동이 얼마나 정당에 의존하고 있었는지는 2004~2006년 이탈리아 — 유럽에서 급진화가 가장 뚜렷했던 나라 — 의 부정적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2002년 피렌체 ESF를 정치적으로 이끈 재건공산당은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나중에는 이탈리아군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한 중도좌파 연립 정부에 참여했다. 이것은 한동안 이탈리아 반전 운동을 마비시켰고 유럽 전체의 운동을 사기저하와 혼란에 빠뜨리는 데 일조했다.

또, ESF는 관료적 힘겨루기의 장이 됐다. 남반구의 다양한 장소를 순회하며 열리는 WSF는 장소에 따라 여전히 약간의 활력을 보이고 있다. 2008년 브라질 벨렝 WSF는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안세계화 운동의 에너지는 5년 전과 비교해 희미하다. 아이러니인 것은 바로 이 순간 자본주의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세계화 운동은 자본주의·제국주의·전쟁에 반대하는 급진화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유산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 전 세계적으로 싸울 수 있음을 보여 준 시애틀·제노바·뭄바이의 기억을 남겼다. 새로운 투쟁이 그 반자본주의 정신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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