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은 대통령 후보 시절 자신의 방송 특보를 지낸 김인규를 KBS 사장으로 임명했다. KBS 기자협회 블로그 ‘싸우는 기자들’에 올라온 김인규의 기자 시절 보도 내용을 보면, 그가 어떻게 MB 특보를 거쳐 KBS 사장 자리까지 올라가게 됐는지 알 만하다.
김인규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인 1987년 1월 15일 민정당 창당 기념식을 보도하며 “민정당은 창당 때부터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 청렴 정치에 앞장서 왔습니다” 하고 추켜세웠다. 전두환의 호헌 선언을 “유일한 길”이라며 떠받들었고 노태우의 대선후보 선출은 “민주정치 발전의 결정적 전기”라며 시종일관 학살자·독재자들을 찬양했다.
1987년 당시 수많은 노동자·학생 들이 언론사 유리창에 돌을 집어 던진 것은 바로 이런 자들 때문이었다.
정권의 언론 통제가 강하던 시절이기는 해도 “정도의 차이라는 게 있다. 1979년 정치부에 입문한 김인규는 전두환과 5공화국을 등에 업고 성장한 전형적인 정치엘리트 기자다. 지속적으로 정권에 부역하면서 ‘정치부 차장, 정치부 부장, 미국특파원’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이력을 얻어 냈다.”
한 네티즌의 지적처럼 김인규는 독재의 후예들에게 아부하며 “20년 동안 한 우물을 판” 결과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이런 자가 방송사의 통제권을 갖게 되면 얼마나 친재벌·반노동·반민주적 보도를 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이런 사이비 언론인을 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KBS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당한 투쟁일 뿐 아니라 1987년 이래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켜 온 노동자 투쟁의 소중한 일부다.
2일 KBS 노동자들의 총파업 찬반투표는 아쉽게 부결됐다. 투표자의 57퍼센트가 찬성했으나 재적 인원 과반수에 약 2퍼센트(77명) 모자랐다. 현행 법은 불합리하게 파업 가결 요건으로 투표 인원이 아니라 재적 인원의 과반수를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KBS 노조 지도부가 김인규의 출근을 막지 못한데다 이미 업무를 시작한 후 파업 투표에 들어간 것이 아쉬운 결과에 영향을 끼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YTN 노동자들의 단호하고 끈질긴 투쟁은 낙하산 사장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갈 길을 보여 줬다. 만약 KBS노조 지도부가 계속해서 시간을 끌며 투쟁을 회피한다면 사원행동, PD협회, 기자협회 등 기층 조직들이 주도력을 발휘해 실질적인 투쟁을 조직하고 김인규를 저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