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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전문] 알렉스 캘리니코스 VS 마틴 울프:
자본주의의 미래 ─ 현 경제 위기의 원인과 전망

다음은 런던 킹스 칼리지의 두 라이벌 학생 모임인 ‘자본론 강독 그룹’과 ‘비지니스 클럽’이 공동 주최한 토론회 ‘자본주의의 미래 — 현 경제 위기의 원인과 전망’의 발제문이다.

발표자인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이자 킹스 칼리지 교수이며,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책갈피), 《자본주의의 대안과 사회주의 가치 논쟁》(책갈피)의 저자다. 또 다른 발표자인 마틴 울프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경제 평론가이며 《금융공황의 시대》(바다출판사)의 저자다.

번역은 동시 통역자이자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책갈피)를 번역한 천경록이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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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알렉스 캘리니코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이자 킹스 칼리지 교수,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책갈피), 《자본주의의 대안과 사회주의 가치 논쟁》(책갈피) 저자

먼저 이 자리를 마련해 준 킹스 칼리지 비즈니스 클럽과 자본론 독서 모임에 감사한다. 또한 이 중요한 토론에 응해 준 마틴 울프에게도 감사한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1930년대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비록 지난 몇 개월 사이 경기가 비교적 안정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IMF는 올 한 해 동안 세계 무역이 12퍼센트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이는 수십 년 동안 세계 무역이 매년 플러스의 성장을 기록한 것에 비춰 보면 엄청난 일이다. 올해에는 또한 세계 경제의 산출량이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수도 있는데, 이 역시 경제사적 대사건이다.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이상 현상이다. 그렇기에 오늘 토론은 패러독스인 측면이 있다. 이번 위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미래가 파괴됐다.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위기의 원인을 규명해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매우 어렵다. 주류 경제학 자체에 경제 위기가 끼어들 틈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킹스 칼리지에는 신기하게도 경제학부가 없다. 나는 그것을 좋게 생각한다. 주류 경제학은 학문이라 하기에도 민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주류 경제학은 응용 수학의 일종으로서, 현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오래 전에 포기했다. 그나마 세상을 이해하려 할 때조차 말도 안 되는 가정을 기초로 그렇게 한다. 금융 시장에 관한 주류 경제학의 기본 전제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라는 것인데, 그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요지인즉 제대로 작동하는 금융 시장에서는 자산 등의 가격이 그와 관련 있는 모든 정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지난 3백 년간의 자본주의 역사(온갖 공황과 위기와 불황으로 점철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 가설이 헛소리임을 대번에 알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수십 년간 금융 시장 확장을 합리화해 줬고 주류 사상의 토대가 돼 왔던 것은 바로 이러한 헛소리였다.

그러니 경제 위기를 이해하고 싶다면 주류 경제학을 가르치는 학교에는 가지 말라. 그래도 〈파이낸셜타임스〉(이하 FT)는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임에도, 아니 어쩌면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에 지난 35년 동안 FT를 탐독했다. FT의 분석이 매우 탁월하기 때문이다. 마틴 울프도 그러한 분석을 제시하는 데서 큰 몫을 했다. 그러나 FT조차도 이번 위기를 대단히 협소한 관점에서 다룬다. 올봄에 FT는 이번 강연과 똑같은 제목(“자본주의의 미래”)으로 좌담회를 주최했는데, 그다지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FT가 기껏 섭외한 가장 좌파적인 토론자는 룰라 대통령이었다. 요즘 룰라는 그다지 좌파도 아니라는 얘기를 아무도 FT 측에 해 주지 않았나 보다. 심지어 FT는 단 한 명의 비중 있는 케인스주의자도 섭외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길 건너편의 런던정경대학(LSE)에 있는 로버트 웨이드 교수(신자유주의에 대한 매우 정교한 비판을 제기한)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런 탓에 자본주의에 대한 상반되는 관점 사이의 정면 대결은 매우 필요함에도 아직 없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그러한 정면 대결이 생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

나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기초로 수행했던 정치경제학 비판이야말로 주류 경제학보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먼저 마르크스가 이해한 자본주의의 두 가지 핵심 요소를 살펴보자. 첫째는 계급 착취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 하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관계는 사회의 생산 수단을 통제하는 계급인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관계다. 노동자라고 하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직장에서 일하지만 어쨌든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이라고는 일할 수 있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일할 수 있는 능력만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자산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용자(자본가)와의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착취 당하게 된다. 즉, 이들의 노동은 자본주의의 원동력이자 성공의 척도인 이윤의 원천이 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첫 번째 근본적 특성이라면, 두 번째는 근본적 특성은 경쟁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이 싸우는 형제들과 같다고 했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에게서 이윤을 착복하지만 개별 자본가들은 그 이윤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자본가들과 경쟁한다. 주류 경제학 교과서는 바로 이 같은 경쟁적 투쟁이 효율성과 소득, 산출량을 증가시키는 원동력이라 말한다. 그러나 경쟁은 또한 뿌리깊은 불안정성의 원천으로서 자본주의 역사 내내 주기적으로 위기를 불러온 주범이기도 하다.

현재 위기가 발생하기까지

마르크스가 발견한 자본주의의 이 두 가지 요소를 서로 결합해서 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보면 자본주의가 대단히 불의한 체제인 동시에 대단히 불안정한 체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위기는 마르크스의 분석이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 것 같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가? 1990년대 이후 두 차례의 호황(2000년대 초의 짧은 침체기를 전후로 해서)이 있었는데, 둘 다 금융시장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90년대 말에는 주식 시장을 중심으로, 2000년대 중반에는 주택 시장을 중심으로 하여 거대한 투기적 거품이 일었다. 두 차례의 호황 모두 이 같은 거품에 크게 의존했다. 자산 가격이 오르면서 사람들은 예전보다 부유해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됐고, 더 쉽게 돈을 빌리고 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적어도 선진국의 경제 성장률은 1950∼60년대의 장기 호황 때보다 현저히 낮았다. 또한 소위 호황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평균 생활수준이 정체하거나 하락했다는 점에서 1950∼60년대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실제로 지난번 호황과 관련한 각종 수치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마틴의 동료 기자인 에드워드 루스에 의하면 2001년에서 2006년 사이 미국에서는 중위 가계의 실질 소득이 1.1퍼센트 하락했다. 이는 2천 달러에 해당하는 돈이다. 상위 1퍼센트의 실질 가계 소득은 같은 기간에 2백3퍼센트 증가했다. 상위 0.1퍼센트의 경우 증가율은 4백25퍼센트였다. 달리 말해, 지난 15년 사이에 발생한 소위 호황들은 금융 투기의 산물이었을 뿐 아니라 빈부격차 확대를 동반한 것이었다.

저들의 대책 — 노동자 공격

이상이 이번 위기 직전까지의 상황이었다. 이번 위기가 터진 것은 주택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투기 거품이 국제 금융 시스템의 대부분을 연루시킬 정도로 과잉 확장된 나머지 그것이 붕괴했을 때 단지 금융권만 파탄난 것이 아니라(그것만으로도 재앙적이었겠지만) 세계 경제 자체가 파탄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기가 커지고 1930년대와 비슷한 대공황이 우려되자 정부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다들 알겠지만 지난해 가을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정부가 엄청난 돈을 쏟아 부으며 은행을 구제하고 나섰다. 구제금융의 규모가 얼마나 컸으면 우익인 니얼 퍼거슨(내가 알기로 그는 경제사가로서 FT의 공동 편집자로도 일하고 있다)이 최근에 쓴 정치학 연구 센터 책자에서 “우리는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살고 있다”고 했을 정도다. 퍼거슨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갈수록 경제 권력의 집중 현상이 나타나고 국가가 사적 자본의 뒤를 봐주게 된다는 레닌, 부하린, 힐퍼딩의 지적은 옳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번 위기에서 살아남은 은행들은 정말로 국가의 후원 덕분에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그다지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닌 조지 소로스마저 은행들의 이윤이 국가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돈방석에 앉은 은행들은 이제 늘 하던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국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봐, 우리를 구제하느라 돈을 너무 많이 빌렸잖아. 나라 빚이 산더미처럼 불었어. 국가 재정을 이렇게 무책임하게 운영해도 되는 거야? 미래 세대들이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됐잖아! 재정 적자를 당장 줄여!” 그게 무슨 뜻일까? 공공 지출을 삭감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지난 몇 달 동안 공공 지출을 삭감하라는 목소리가 점점 거세져 왔다. 유감스럽지만 마틴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는 6월에 쓴 어느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공 지출을 어떻게 삭감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영국 정치에서 핵심 쟁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우리의 선택지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할 의지가 없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영국에는 새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 그게 어떤 정부일지 자못 궁금하다. 마틴은 이어서 “피할 수 없어 보이는 고통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라고 말한다. 그보다 한 달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임금 동결이다.” 물론 은행이 아니라 공공부문의 임금 동결을 말하는 것이다. 또, “분권화된 임금 협상, 피고용자들도 공적 연금의 보험료 일부를 부담하게 하는 것, 그리고 복지 삭감도 필요하다. 이는 분명 정부와 공공부문 근로자들 간에 대대적이고 고통스러운 갈등을 유발할 것이다.” 우체국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도 보이듯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틴의 말이 옳았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절망적으로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위)와 오늘날 역시 절망적으로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아래) ─ 과연 자본주의는 “적응 발전”하는가?

하지만 이 모든 논의는 한 가지 수수께끼를 던져준다. 그 쓸모 없다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이를테면 교사, 소방관, 간호사, 우편부, 이런 사람들이 도대체 경제 위기에 어떤 책임이 있단 말인가? 이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 옛날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 때문에 경제 위기가 발생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번 위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못한다. 즉 공공부문 노동자들뿐 아니라 공공 서비스를 향유하는 일반인들 중 누구도 이번 위기에 대해 책임이 없다. 그런데 왜 혹자는 그들더러 대가를 치르라고 하는가? 그 답은 계급 권력과 관련 있다. 이번 위기는 은행들의 힘이 실로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 줬다. 은행들은 파산 지경에 내몰려 국가의 도움으로 생존하고 있을 때조차 경제 위기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정책을 국가에 요구할 정도로 강력한 대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 적대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인가? 다른 설명이 있다면 부디 들려주길 바란다.

위기의 원인은 또 어떤가?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할 시간이 없지만, 이미 말했듯이 위기의 배경에 금융화라는 것이 있었다. 달리 말하면 금융 부문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영국 금융 당국의 수장조차 은행들이 덩치가 너무 크고 사회적 관점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말할 정도다(그런데도 왜 은행이 아니라 공공 지출이 삭감돼야 하는 것인지 더욱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금융화 현상 자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사가인 로버트 브레너가 매우 설득력 있는 증거를 들어 보여 줬듯이, 선진국 경제권은 1960년대 말부터 오랜 수익성 위기를 겪어 왔다. 이로 인해 체제가 붕괴하지는 않았지만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둔화했고 성장을 지속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부터는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오늘날에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앨런 그린스펀 같은 선출되지 않은 중앙은행장 등이 그런 일을 담당한다)이 경제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금융 부문의 팽창을 선택한 것 같다. 브레너는 이를 자산 가격 케인스주의라고 묘사한 바 있다. 주가나 주택 가격 상승을 부채질함으로써 그러한 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이 마음 놓고 돈을 빌려 쓰도록 부추기는 방식으로 유효 수요를 창출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 자본주의의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단기적인 미봉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그 모든 사회 공학과 노조 때리기와 임금 억제도 이윤율을 1960년대 수준으로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마지막 거품(사실 그것이 우리가 본 마지막 거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거품을 키우고 있으니 말이다)은 너무가 크게 부풀려졌던 나머지 그것이 터지는 순간 세계경제도 함께 붕괴하고 말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지난 30년간 기세등등하게 전진해 온 자본주의가 실패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논리를 재천명해 경쟁에 대한 일체의 장벽을 파괴하고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거대한 붕괴와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안은 있는가?

버락 오바마의 비서실장인 람 에마누엘은 전혀 진보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좋은 말을 한마디 했다. “이런 위기는 그냥 흘려 보내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비록 미국의 협소한 정당 정치 논리를 바탕에 깔고 한 말이지만 그래도 좋은 말이다. 우리가 지난 30년 동안 겪어 온 경제 질서와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약점을 이토록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위기는 정말로 그냥 흘려 보내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현 질서에 대한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진지한 반자본주의 좌파라면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하려는 얘기도 대안에 관한 것인데, 이는 마틴의 예상되는 반론에 대한 일종의 선제 공격이기도 하다. 마틴은 아마도 “자본주의의 꼴이 말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 말이 맞더라도 그것은 사실 꾀죄죄한 주장이다. 심지어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보다도 현실이 더 우울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비록 끔찍한 체제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그것을 타도하고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만약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단지 자본주의가 끔찍한 체제일 뿐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일 것이고, 그 경우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꾀죄죄하다고 생각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소련과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패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온전히 작동하는 체제로 정착되기까지 5백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온갖 시행착오와 불발로 끝난 혁명, 일보 전진과 일보 후퇴를 겪어야 했다. 자본주의가 그랬을진대, 자본주의의 대안을 건설하려는 제한적이고 온갖 역사적 제약 때문에 실패로 끝난 단 한 번의 시도를 근거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다.

진정한 민주적 계획 경제

그러나 나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대략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안은 민주적 계획이다. 즉, 직장과 지역 기반의 평의회로 조직된 소비자들과 생산자들이 지역 수준에서, 그리고 필요하다면 더 높은 수준에서 최대한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자원의 이용에 관한 사항을 결정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시스템이다. 시간 관계상 이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될지를 논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미 마이클 앨버트와 팻 드바인 같은 몇몇 경제학자들(당연히 주류 학계에서는 완전히 외면받는)이 이에 관한 매우 상세한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앨버트는 ‘참여 경제’라고 부르고 드바인은 ‘협상에 의한 조율’이라고 부르는 이 모델들은 민주적 계획 경제(스탈린주의 체제의 관료적 지령 경제와는 대비되는)의 작동 방식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은 몇 년 전에 비해 ‘계획’을 기각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앞으로 이 세상에는 계획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의 위협이 정말로 그렇게 심각하다면,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극적인 감축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라면(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약 90퍼센트 정도 감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측면에서 우리가 직면한 선택이 꼭 “시장 아니면 계획”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시장은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국가의 부축을 받아 비틀비틀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다. 오히려 우리가 직면한 선택은 “어떤 종류의 계획이냐”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앙집중적이고 기업 주도로 이루어지는 계획인가(내 생각에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기후 변화에 대응하려는 시도는 이런 형태를 띨 것이다), 아니면 이윤보다 인간의 필요가 우선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설되는, 진정 민주적인 아래로부터의 계획인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인류 앞에 놓일 선택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정리하자면, 나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논쟁에 전혀 수세적인 자세로 임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내가 보기에 지난 2년간의 사태 흐름은 마르크스가 1850년대와 60년대에 자본론을 집필한 이후로 그의 후학들이 계승·발전시킨 자본주의 분석의 올바름을 확인시켜 줬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으로, 이번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에 대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웅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틴 울프

마틴 울프 <파이낸셜 타임스> 수석 경제 평론가, 《금융공황의 시대》(바다출판사) 저자

이런 토론 자리가 마련돼서 매우 기쁘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들이 제기된 것 같다. 내가 약간 더 나이가 많긴 해도 알렉스와 나는 같은 세대다. 나도 1965년에 알렉스와 같은 대학을 다녔는데, 우리에게 이런 토론 주제는 대단히 익숙하다. 당시에는 학생 운동이 절정에 도달했고, 임박한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논의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우세한 사상 조류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둘의 생각은 그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내 칼럼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내가 항상 질문부터 던지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래서 먼저 질문 하나를 던지려 한다. 어떤 점에서는 알렉스의 발표와 관련이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관련이 없기도 할 것인데, 이는 우리 모두 현 사태에 대한 각자의 설명을 늘어놓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상 불가피하다. 그래도 발표 뒷부분에 시간이 남는다면 알렉스가 제기한 논점 몇 가지에 최대한 답해 보겠다.

자본주의는 왜 망하지 않나?

내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에도 이런 위기가 있었는가? 둘째,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가? 셋째, 위기가 끝나고 있는가? 달리 말하면, 이번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가? 넷째, 재발 방지가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이번 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다들 알겠지만 이에 대한 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견했지만 번번히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먼저, 과거에도 이런 위기가 있었는가? 이와 관련해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말을 상기해 볼 만하다. 그는 《설득의 에세이》에서 1930년대의 위기를 “발전기 고장”이라 묘사한 바 있다. 그 뜻인즉, 어떤 이유에서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엔진에 결함이 생겼는데 그 결함을 찾아내서 고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어떤 면에서는 궁극의 반(反)마르크스주의자(그것도 매우 유능한)였다. 당시의 경제 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했음에도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우리도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케인스의 《일반 이론》이 출판된 해인 1936년에 우리가 이런 토론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 청중들 거의 대부분이 자본주의가 끝장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대공황에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던 유일한 경제권은 소련과 나치 독일 정도였다. 그래서 어느 모로 보나 사회주의가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풍비박산이 났고 수입 규제가 보편화 됐으며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실업률이 노동인구의 4분의 1에 달할 지경이었다. 대부분의 경제가 공공부문 부채와 은행 파산 물결로 큰 타격을 입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미국 은행의 절반가량이 대공황기에 사라져 버렸다. 물가가 엄청나게 폭락했고 각국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했다.

이 모든 사실을 봤을 때 그 당시에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끝났다고 결론지었을 법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것으로 입증됐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그때 자본주의가 끝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내가 이번 위기의 재발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데, 바로 자본주의가 적응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체제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주의가 경제·정치적으로 탈중앙화된 시스템으로서 유연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소비에트 체제는 어땠는가? 물론 스탈린주의의 사례가 진정한 사회주의적 이상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 기억에 1950∼60년대에는 서구 모델보다 월등히 우수한 모델로 널리 알려졌던 소비에트 체제는 결국 적응에 실패했다. 권력과 정보가 중앙 집중화된 체제는 극도로 경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 가장 덜 나쁜 체제

이 대목에서 케인스의 사상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가 ‘적응’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도 처방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총수요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총수요가 항상 완전고용 수준으로 유지될 것이라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경제 체제의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잘 파악해서 해결해 나가야 하며 그렇게 했을 때 시장경제의 탈중앙화되고 경쟁적인 속성이 나머지를 해결해 줄 것이다[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따라서 이번 위기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분명 알렉스와 다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정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복잡한 경제와 사회를 운영하는 최상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실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덜 나쁜 시스템이다. 탈중앙화된 정보를 활용하는 경쟁적 시스템은 알렉스가 제시한 고도로 복잡한 투표 시스템보다 비할 데 없이 더 효율적이며, 인간의 불완전성을 오히려 생산적인 요소로 만든다. 물론 자본주의는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므로 절대 완벽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명시적으로 비(non-)유토피아적인 체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유토피아를 겪어 봤고, 더는 필요없다.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명백히 고장이 났을 때면 우리는 그 원인을 파악해서 칼 포퍼가 말한 “점진적 사회 공학”을 적용해야 한다. 즉 고장 난 특정 부분만 찾아내서 고치면 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1930년대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다. 이번 위기가 대공황의 재판이 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덕분이다. 이번 위기가 끝날 때 쯤이면 전 세계 GDP가 처음에 비해 아마도 2~3퍼센트 수축돼 있을 터인데, 이 말인즉 최악의 경우에도 세계경제 규모가 2007년과 대략 비슷해져 있을 것이란 말이다. 이는 분명 상당한 충격이긴 하겠지만 파국을 논할 정도는 아니다.

2009년 케냐 난민촌에서 굶주리는 어린 아이 ─ 경제 위기로 빈곤이 심화하면서 10억 명이 아사 위기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는 실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덜 나쁜 시스템이다.” (마틴 울프) vs “자본주의가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을 것” (알렉스 캘리니코스)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고전적인 개도국형 금융위기가 이번에는 세계경제 중심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이먼 민스키 교수가 말했듯이 금융위기는 탈중앙화된 시장 경제 체제의 고전적 특징이다. 그렇다면 금융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민스키는 다음과 같은 원인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새로운 시장 기회, 즉 이전에는 신용을 공급받지 못했던 새로운 금융고객층의 등장(서브프라임모기지 대출은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새로운 대부자들의 등장, 자산 가격 거품(국제 시장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무차별적인 대출(이번에는 초대형 은행들이 이를 주도했다), 자산 가격 거품의 붕괴, 그리고 갑작스러운 패닉과 경제 활동 마비. 그런데 우리가 이번 위기와 같은 사태의 재발 가능성을 극적으로 줄이려면 이번 ‘민스키 순환’이 왜 발생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첫째로 고전적인 도취감이 작용했다. 달리 말해, 전 세계의 의사결정권자들이 경기순환 종말론이나 다름없는 ‘대안정론’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에 사로잡혔다. 엄청난 도취감에 빠진 것이다. 둘째, 알렉스가 이 점을 언급 안 한 것이 흥미로운데, 바로 동아시아 등지에 새로운 권력 중심들이 떠오르면서 자본주의에 어마어마한 구조적 격변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엄청난 금융 현상들이 나타났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동아시아 경제들이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축적하면서 나타난 글로벌 불균형 현상은 여러 결과를 초래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한동안 명목이자와 실질이자가 전에 없이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 결과 투자자들은 더 높은 이자 수익원을 찾아 나서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안락해 보이는 경제 여건과 ‘대안정’에 대한 근거없는 믿음이 결합돼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전적으로 인플레 억제만을 목표로 삼는 통화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것이 중앙은행들에게 요청되던 바이기도 했다. 이 같은 배경 하에서 민스키가 “고전적 금융 혁신기”라고 부른 시기가 도래해 명목상 안전한 금융 상품들이 새로 등장했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그렇듯 정부와 금융 당국은 뻔한 실수들을 저질렀다. 완전히 부적절한 자기자본 비율을 적용했고 주택 시장과 증권 시장에 대한 규제는 필요 이상으로 완화했다. 그런데 이번 위기는 전후에 발생한 과거의 경제 위기들과 근본적으로 다른가? 나는 세 가지 면에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위기가 각별히 심각한 것도 그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번 위기는 세계 GDP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제권을 직접 강타했다. 둘째, 대출 패턴이 과거 어느 금융위기 때보다도 더 복잡해서 그만큼 꼬인 실타래를 풀기가 더 어려웠다. 셋째, IMF가 미국 경제를 구제해 줄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미국은 스스로 자기 나라 경제를 구제했다.

끝나 가는 위기

세 번째 질문. 이제 위기가 끝나가고 있는가?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먼저 위기가 왜 끝나가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세계 각국 정부는 케인스의 이론을 배운 덕분인지 경제 위기가 닥치자 전후 역사상 가장 눈부신 공조를 취했다. 이에 따라 선진국에서는 재정 적자가 2007년의 평균 1퍼센트에서 2009년의 9퍼센트로 대폭 확대됐다. 단기 금리는 0퍼센트로 떨어졌고 경제적 파급력이 큰 기관들의 부채는 사회화됐다. 이는 역사상 가장 케인스주의적인 정책이었고 케인스 자신도 만약 살아 있었다면 제안했을 만한 정책이다. 그리고 이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경기 추락이 2 분기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가 안정화됐고, 신용 시장이 극적으로 회복됐으며, 공산품 교역량의 급강하 추세가 반전되고 있다. 경제 성장률 전망치도 이제 꾸준히 상향 조정되고 있어서 다음 한 해에 세계경제는 아마 우리도 깜짝 놀랄 만큼 높은 성장률을 보일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우리가 극복해야 할 큼직한 난제들이 남아 있는데, 특히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몇몇 고부채 국가에서의 디레버리지[부채 축소]가 필요하다. 많은 나라에서 민간 소비가 아직 활기를 띠지 못하고 있고, 경기회복에 꼭 필요한 글로벌 불균형 해소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무엇보다 각국 정부의 재정적자 문제가 남아있다. 세계 각국 정부는 이번 위기에 대응하여 매우 올바르게도 막대한 재정 지출을 해 왔다. 그래서 예컨대 영국 정부는 세수 3파운드당 4파운드를 지출한다. 그런데 내가 그동안 칼럼을 통해서 지적해 왔듯이,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세수를 3분의 1만큼 확대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완벽히 합리적인 대안이다. 하지만 나는 정치 논리상 세금 인상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현재의 구조적 재정적자(현재 재정적자의 적어도 일부분은 분명 구조적이다)를 해소하려면 지출을 삭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 우리는 이번 위기를 통해 금융위기의 대가가 실로 비싸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또 하나 우리가 배웠고 향후 1, 2년 중에 더욱 확실해질 것은 1930년대에 논의된 경제위기 대응책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스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럽겠지만 이번에도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한 얘기는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대안 — 점진적 사회공학

넷째, 위기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솔직히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시장경제는 수십억 단위의 인간과 재화를 공시적이고 무엇보다 통시적으로 상호 조율하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이 때때로 고장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시스템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금융 시스템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두려움(예컨대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믿음에 주택 융자를 받는 사람들의 기대)을 반영하는 시스템으로서 본질상 불안정하며 때때로 고장 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위기 직전처럼 도취감이 팽배한 상황에서는 금융 시스템이 고장 날 개연성이 높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위기는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근 8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인데,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금융 시장 참가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위기 발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위기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행동을 일삼은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에 대한 민스키의 설명과도 잘 들어맞는다(아시다시피 민스키는 20세기 후반에 금융 시장을 연구한 가장 비중 있는 케인스주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금융 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탈중앙화된 시장경제는 어떤 것이든지 다 그렇다. 그러나 이번 위기의 재발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면 여러 가지 조처가 필요할 것임은 분명하다. 특히 자산 가격 거품에 대응해 훨씬 더 공격적인 통화 정책을 써야 할 것이다. 자산 가격이 저절로 균형 상태에 이를 것이라 가정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또한 ‘대마불사’로 여겨지는 핵심 금융기관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자기자본 비율을 대폭 높여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이는 금융 시장의 규모를 적정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금융기관에 실효성 있는 의결 구조를 도입해야 하고, 금융 서비스 공급체계도 뜯어고쳐야 하고, 모든 금융 상품이 거래소 내에서 매매되도록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부채에 대한 과도한 세제 혜택을 철폐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장경제 같은 고도로 복잡한 시스템을 다룰 때는 바로 이런 종류의 점진적 사회 공학을 적용하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한다.

자본주의에 돈을 걸어라!

자,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자. 이번 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정말 미안하게도 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생산적이고 성공적인 경제 시스템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그럴 수 있는 건 그것이 수억, 수십억 명의 독자적 활동을 상호 조율하며 그러한 활동에 의해 지탱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설령 [서구에 사는] 우리가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싶더라도 인도와 중국으로 하여금 시장경제라는 실험(매우 통제된 실험이긴 하지만)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이 두 나라에게는 경제 자유화가 상상을 초월하는 혜택을 안겨 줬기 때문이다. 1980년 이후 중국의 1인당 GDP는 10배 성장했고 인도는 4배 성장했다. 이들이 무슨 잠꼬대 같은 대안을 믿고 자본주의를 포기하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의문은 자본주의를 폐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과연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가 국민 경제의 영역으로 남아야 하고, 어느 정도까지가 세계화돼야 하는가? 달리 말하면 2차 대전 직후의 폐쇄적 경제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까지 회귀해야 하는가? 자유 시장과 정부 규제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 분명 지난 몇 년에 비해서는 규제가 대폭 강화돼야 하겠지만, 문제는 얼마나 강화돼야 하느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일한 자본주의 모델이 득세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의 모델들이 공존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자명해 보인다. 오직 하나의 단순한 자본주의 모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보다는 다양한 모델들이 공존하게 될 듯하다. 요컨대, 지금의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구적 차원의 개혁과 여러 가지 제도적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것이 지금껏 진행돼 온 일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껏 설명한 여러 조처들이 취해지고 나면 자본주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다시금 그 탁월한 적응력을 입증해 보일 것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시장경제 체제에 편입된 덕분에 생활수준이 엄청나게 향상된 수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길 강력히 희망할 것이다. 이미 내가 시간을 충분히 잡아먹었으므로 알렉스가 제기한 구체적 논점들은 뒤에 가서 다루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나의 기본 요지는 간단하다. 자본주의는 때때로 실패하지만 언제나 살아남는다. 자본주의에 돈을 걸어라!

알렉스 캘리니코스 VS 마틴 울프 논쟁 정리 발언

마틴:

[알렉스는] 전 세계적 수준에서 투표를 통해 생산을 조율하는 것이 쉬운 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는 몽상이다. 수억 단위에 이르는 사람들의 소비에 관한 사항을 어떻게 일일이 투표로 결정한단 말인가?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계획에 대한 하이에크의 비판은 타당하다. 중앙의 어떤 기구가 경제 활동을 계획하는 데 필요한 무수히 많은 정보를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체제가 우수한 점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준다는 점에 있다. 시장경제의 동기부여야말로 [중국, 인도 등지의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원동력이다. 몇 세대가 지나면 현재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우리와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어떤 문제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를 끊임없이 고쳐 나감으로써 이번 위기와 같은 사태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런 노력은 효과가 있다. 내가 제안한 조처들이 취해지고 나면 다음번 위기는 70∼80년 뒤에나 도래할 것이라 믿는다. 지난번에 이런 위기가 도래했던 것이 70∼80년 전이었다.

알렉스:

먼저 케인스에 관해서 한마디 해야겠다. 케인스가 반(反)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 것은 맞지만, 그가 어떤 점에서는 반(反)자본주의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마틴은 간과하고 있다. 민스키도 흥미로운 경제학자이지만 케인스는 민스키보다도 더 급진적이다. 민스키는 자본주의 하에서 금융 시장이라는 카지노의 존재가 불가피하다고 믿는다. 카지노가 주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긴 하지만 그때마다 문제를 고치면 그만이라는, 마틴과 비슷한 관점이다. 반면 케인스는 카지노를 아예 폐쇄해야 한다고 말했다. 투자를 사회화하자는 주장도 했다. 이는 자원 배분에 관한 중요한 결정권을 민간 부문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는, 대단히 급진적인 관점이다. 그런 점에서 각국 정부는 요 근래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경제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해 케인스를 너무 제멋대로 원용하는 것 같다. 또한 지금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러한 정책의 결과로 다음번 위기가 70∼80년씩이나 유예될 것 같지도 않다.

동기부여에 관해서도 한마디 하겠다. 오직 돈을 위한 욕심만이 인류가 성취한 모든 진보와 발명의 원동력이라는 생각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오늘 이 행사 자체가 그에 대한 절묘한 반박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는 무수히 많다. 시기심처럼 안 좋은 동기도 있겠지만 호기심이나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 혹은 단순히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등이 획기적으로 진보하는 것은 종종 그런 동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채찍과 당근이 없다면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어리석다. 시장주의라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 사람의 시야가 얼마나 보수적이게 될 수 있는지를 마틴이 몸소 보여 주는 것 같다.

이제 계획의 문제로 넘어가자. 계획에 대한 하이에크의 비판은 경제에 관한 모든 정보가 한 곳에 집중되는 계획 모델을 전제로 삼는다. 실제로 그런 종류의 계획은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는 하이에크가 옳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보와 의사결정이 분권화해 있는, 다른 종류의 계획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국가적 또는 국제적 수준에서 기본적인 방향이나 우선순위만 합의된다면 이를 바탕으로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대부분의 결정이 지역 수준에서 취해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이 마치 “탈중앙화하고 정보를 다루는 역량이 뛰어난” 자본주의 아니면 “고도로 중앙집중화한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본주의는 갈수록 중앙집중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번 위기에서 드러났듯이 정보를 다루는 데 있어서 재앙적일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종말이 필연적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번 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뜻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바보가 아니고선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인류에게 보내진 경고이기는 하다. 우리 삶의 방식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는 경고 말이다. 그 경고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우리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