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노동계급은 사회 변혁의 핵심 주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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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故 크리스 하먼이 2009년 7월 다함께가 주최한 진보 포럼 ‘맑시즘2009’에서 연설한 것을 옮긴 것이다.
크리스 하먼은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영국의 좌파 이론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편집자였고, 그 전 20여 년 동안 좌파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의 편집자로 일했다. 올해 카이로에서 이집트 시민사회단체들이 개최한 포럼에 연사로 참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대학생 단체들의 2009년 대학생 추천도서 50선에 꼽힌 《민중의 세계사》(책갈피)를 비롯해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책갈피, 공저), 《오늘의 세계경제 : 위기와 전망》(갈무리),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책갈피), 《패배한 혁명 : 1918~1923년 독일》(풀무질) 등 10여 권이 있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RATM이 2집 앨범 〈악의 제국Evil Empire〉 재킷에서 《세계를 뒤흔든 1968》(책갈피)을 포함한 크리스 하먼의 책들을 추천하기도 했다.
지난 1년 사이에 명백히 드러났듯이,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를 거듭해서 불러오는 체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또한 전쟁을 양산합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지에서 그런 것처럼 말이죠.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도 초래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한 세기만 더 지속되면 정말로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어떻게 타도하느냐’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자본주의를 타도할 주체가 누구냐’는 물음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물음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1백50년 전에 살았던 칼 마르크스에게 답은 간단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주의를 종식시킬 거대한 계급을 만들어 낸다고 봤습니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에 주목한 것은 노동계급이 딱히 고결하다거나 초인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이윤을 창출하려고 생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거대한 계급으로 끌어 모은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수많은 농촌 인구를 도시의 공장, 사무실, 항만 등으로 끌어 모읍니다.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사회에서도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으로서 착취당했습니다. 농민들은 각자 자기 땅에 묶여 있었고 서로 고립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의 세계관은 매우 협소하고 국지적이었습니다. 농민들이 단합해서 집단행동을 하기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농민들은 글을 읽고 쓸 필요가 없었고 산수를 못해도 됐습니다. 반면 자본주의는 지리적으로 집중된 피착취 계급을 만들어 냈습니다. 거대한 작업장에 집중돼 있는 노동자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도 집단적으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노동계급은 문자 해독 능력이나 여타 지적·문화적 능력 면에서 과거의 어떤 피착취 계급보다 뛰어나며, 심지어 과거의 어떤 지배계급보다도 뛰어납니다. 그뿐 아니라, 비록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도 하지만, 자본가들 사이의 이윤 경쟁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압박하면서 노동계급의 동질성을 강화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경제 위기나 전쟁으로 치달을 때마다 노동자들은 옛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고 봤습니다.
마르크스는 착취당하는 존재 그 자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즉자적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착취에 맞서 저항할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급으로서 자기 존재를 자각할 때, 그 계급을 대자적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노동계급이 사회의 대다수가 되고, 자본주의를 타도할 역량을 갖게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맞선 집단적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가치관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관을 스스로 만들어 가게 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노동계급이 줄었다?
마르크스의 이 같은 관점은 항상 비판 받아 왔습니다. 사회학자들은 노동계급이 규모가 확대되기는커녕 축소됐다고 말합니다. 노동자들이 집단으로서 싸우기는커녕 저마다 혼자 싸우며, 자본주의 정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고도 합니다. 불행히도 우파뿐 아니라 좌파 가운데 상당수도 이런 주장들을 수용합니다. 가장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좌파들인 하트와 네그리가 노동계급은 더는 사회변혁의 주연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노동계급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사회변혁 세력으로서 예전보다는 훨씬 덜 중요해졌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제기할 첫 번째 반론은, 어떤 통계를 봐도 노동계급이 작아지기는커녕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는 사실입니다. 데인 필머라는 학자가 15년 전쯤 세계 노동계급에 대한 방대한 통계학적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 노동력 규모가 25억 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중 4억 명이 생산직, 8억 명이 서비스직, 10억 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수치들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과반수의 노동력이 농업이 아닌 부문에 종사하고 있음을 보여 줬기 때문입니다. 한 세기 전이었다면 세계 인구의 4분의 3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예견한대로 자본주의는 농촌 인구를 도시로 유입시키고 땅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임금 노동자로 만들어 세상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물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임금 노동자는 아닙니다. 소수는 자영업자거나 영세 사업가들입니다. 더욱이 가난한 나라에서는 도시 인구의 상당 부분이 일정한 임금 소득 없이 구두닦이나 성냥팔이 등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도시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이런 식으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전 세계 인구에서 임금 노동자 비중은 40퍼센트가 됩니다. 또한 오늘날 농업 인구 중 50퍼센트는 모종의 임금 노동을 병행합니다. 즉, 오늘날에는 세계 인구의 과반수가 생계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임금 노동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살기 위해 고용주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이 이제 인류의 과반수라는 것입니다. 숫자로 표현하면, 마르크스가 말한 즉자적 노동계급의 규모가 20억 명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논리에 삶이 종속된 인구가 20억 명 더 있습니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노동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컴퓨터를 만드는 노동자들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짓누르는 압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1840년대 섬유 공장 노동자나 오늘날 컴퓨터 공장 노동자나 똑같이 자기 회사에 이윤을 벌어 줘야 하는 압력에 시달립니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한 또 하나 흔해 빠진 반론은,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는 노동자들이 대부분 산업 노동자들이었지만 오늘날 노동자들은 대부분 서비스 노동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실없는 주장입니다. 산업 부문과 서비스 부문은 서로 칼같이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햄버거 패티를 만들어서 깡통에 넣는 사람은 산업 노동자인 반면 맥도날드에서 똑같은 패티를 빵 두 조각 사이에 끼워 넣는 사람은 서비스 노동자로 분류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햄버거 맛이 다른 것도 아니고, 영양가도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맥도날드 매장이나 공장이나 노동 환경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일하든 덥고, 땀이 뻘뻘 나고, 항상 긴장해야 하고, 지치고, 윗사람은 혐오스럽고, 집에 오면 쓰레기 같은 TV 프로를 멍하니 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기 싫고, 열심히 일해서 회사 이윤을 불려 줘야 하고, 그렇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자본 간 경쟁에 의해 삶이 좌우되는 사람으로 정의했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맥도날드 직원은 두말할 것 없이 노동자입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맥도날드 노동자들은 소규모 작업장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맥도날드는 지점당 평균 80명의 직원을 고용합니다. 이 80명이 노조를 결성하면 80명을 고용하는 공장의 노조와 똑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산업 부문과 서비스 부문의 차이 운운하는 사람들은 서비스 부문 종사자들이 모두 중산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서비스 부문에는 온갖 직종이 다 포함되며, 그 중에는 전통적인 육체 노동을 하는 직종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항만의 하역 노동자, 트럭 기사, 쓰레기 수거원도 다 서비스 노동자입니다. 영국에서는 2000년도에 남성 노동자의 51퍼센트가 육체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의 38퍼센트도 비슷한 직업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여성 노동자의 50퍼센트는 육체 노동자는 아니더라도 타이피스트나 비서 같은 하급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자리는 고된 업무, 피로와 스트레스, 천대와 멸시, 그리고 평생 일하는 것 외에 아무런 전망이 안 보이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노동자들이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노동자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 이후 많은 직종들이 커다란 변천을 겪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직종들은 노동계급 일자리에서 중간계급 일자리로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 중간계급 직종이었다가 점차 노동계급화한 것들입니다. 가령 교사들이 그렇습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 교사들은 특권층이었고, 대다수 노동자들보다 훨씬 나은 소득과 대우를 누렸습니다. 스스로도 대다수 노동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선진국의 교사들은 갈수록 육체노동자들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교사들은 기껏해야 다음 세대 노동자들을 길러 내는 노동자 정도로 취급받습니다. 그리고 사실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할 다음 세대의 노동자들을 이렇게 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 하에서 교사들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이 같은 재생산을 자본주의는 최대한 값싸게 해결하려 합니다. 그래서 교사들에게도 공장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것과 똑같은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영국에서는 교사 월급에 성과급제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수업 능력을 끊임없이 평가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사들도 다른 노동자들과 점점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교사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대체로 인구의 40퍼센트가 전통적인 육체 노동에 종사하고 있고 20퍼센트가 하급 화이트칼라 직종에, 15퍼센트가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구의 약 75퍼센트가 노동계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 바로 위에 존재하는 관리자 계층입니다. 관리자 또는 준(semi)관리자 급에 해당하는 이 사람들은 자본과 국가의 편에서 노동자들을 통제·관리하는 대가로 일반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봉급을 받습니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들을 ‘신중간계급’이라 부릅니다. 이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15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대규모 파업 등이 없는 일상 시기에 대중매체는 이 신중간계급의 삶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기에 노동자들의 존재는 거의 잊혀집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6시까지 직장에 갇혀 있는 노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출퇴근 시간에는 잠시 그들을 볼 수 있지만 그 사이 시간대에 TV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온통 신중간계급들 뿐입니다. 그러다가 계급투쟁이 분출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노동자들이 얼마나 사회에서 다수이고,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노동계급은 싸울 능력을 잃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또 한 가지 신화가 있는데, 기업들이 하룻밤 사이에 시설을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전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는 싸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미국과 영국에서는 ‘제조업이 모두 중국으로 이전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에는 더는 노동계급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중국 노동계급의 성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세계 노동계급의 성장이라는 그림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다른 나라의 노동계급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2009년 현재에도 세계 최대의 제조업 국가는 중국이 아닌 미국입니다. 또 세계 최대의 수출국은 중국이 아닌 독일입니다. 중국에서 일부 산업이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에 있는 산업들도 여전히 비중이 큽니다. 시중에서 여러분이 구입할 수 있는 컴퓨터는 아마도 중국에서 조립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컴퓨터 부품은 중국 이외의 동아시아 국가에서 만들었을 것입니다. 비행기도 중국산은 사지 않습니다. 미국산 보잉 항공기나 유럽산 에어버스를 살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중국산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일제, 미제, 독일제, 또는 한국제를 사겠죠. 요컨대 중국 노동계급의 성장이 다른 나라 노동계급을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자본가들로 하여금 자국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공격하도록 하는 압력을 가중시킨 것입니다.
더욱이, 자본가들이 하룻밤 사이에 공장을 다른 나라로 이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헛소리입니다. 버튼 하나를 눌러서 거액의 돈을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나라로 옮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시설 하나가 통째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전할 수 있는 순간이동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공장 하나를 짓는 데는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며, 이전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물론 자본가들은 언제나 공장을 이전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조건을 수용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실시한 어느 조사에 따르면 임금 문제를 둘러싼 노사 분규가 일어날 때마다 사측에서는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겠다며 노동자들을 위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공장을 이전한 경우는 고작 열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이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힘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전 개막식에서 탈라트 아흐메드 동지는 영국의 비스테온 노동자들의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비스테온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을 때 사측에서는 ‘어차피 당신들이 만드는 물건을 아무도 구입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스테온은 포드 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던 업체입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부품 재고분의 반출을 막자 포드사는 갑자기 어디서 돈이 나왔는지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돈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와 연관해서, 노동자들의 힘이 약해졌다고 하는 또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들과 영국의 일부 좌파들은 모든 일자리가 불안정해졌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불안정성’의 함의인즉, 사장들이 어떤 일자리든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으므로 노동자들은 더는 조직화할 수 없고 반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사측은 언제나 노동자들에게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 없다’는 인상을 심어 주려 합니다. 노동자들에게서 법적 권리를 차례로 빼앗아 간 각국 정부들도 이런 자본가들에게 도움이 됐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법률적 권리가 없다 보니 노동자들에게 아예 반격할 능력이 없다는 인상을 사람들이 받기가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자들의 반격 능력은 법률적 권리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멈추고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에서 비롯합니다. 영국에서는 특이하게도 1960년대까지도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장들이 원하면 아무때나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일자리를 지켜 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영국에는 단기 계약직들이 많은데, 결국 고용주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은 노동자들이 힘이 없다는 환상을 조장하지만 노동자들은 조직화해서 싸움에 나설 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나타나는 그림은 결코 노동계급의 소멸 또는 약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노동계급의 연이은 변화입니다. 먼저 노동계급의 규모가 변했습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을 당시 전 세계 노동계급보다 오늘날 남한의 노동계급이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논했을 때 그는 주로 섬유 노동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시대에 사람들은 ‘노동자’ 하면 대개 금속 노동자나 탄광 노동자들을 떠올렸습니다. 1960년대에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전형처럼 여겨졌습니다. 오늘날의 전형적인 노동자는 패스트푸드점 직원일 수도 있고, 자동차 공장 노동자일 수도 있고, 컴퓨터 회사 직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들 모두의 처지가 자본주의의 압력 하에 동질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나라를 가도 노동자들의 옷차림이 서로 엇비슷한 것이 참 신기합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눠 보면 고민거리도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노동에 관한 좌우명이 하나 있습니다. ‘노동자의 인생은 출퇴근, 일, 잠, 이 세 가지가 전부다.’ 오늘날 제철소, 자동차 공장, 섬유 공장, 패스트푸드점, 학교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이보다 잘 보여 주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종합하자면, 오늘날 노동계급은 사라지기는커녕 과거보다 훨씬 커졌습니다. 그런데 노동계급이 인류의 대다수가 되고 보니 나머지 인구와 딱히 두드러지게 구별되지 않는 것뿐입니다. 문제는 노동계급이 단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만 하는 계급으로 남아 있을 것이냐, 아니면 세상을 바꾸려고 투쟁하는 자의식적 계급이 될 수 있느냐입니다.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노동계급의 투쟁과 의식성이 아무런 굴곡 없이 직선 코스로 발전해 온 것은 분명 아닙니다. 어떤 시기에는 소수의 노동자들이 시작한 투쟁이 다른 부문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고무하면서 사회 전체로 확산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런 시기에는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존재에 눈뜨게 됩니다. 영국은 1840년대가 그런 시기였습니다. 모든 소설가들이 노동계급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제1차세계대전 무렵에도 그랬고, 1960년대에도 그랬습니다. 아마 한국에서는 1987년과 88년이 그런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기에는 노동자 투쟁이 패배하기도 합니다. 그런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해결책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해결책으로 눈을 돌립니다. 노동계급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신념도 점점 희미해집니다. 이런 기회를 틈타 사용자들은 산업 구조조정을 단행합니다. 낡은 산업은 쇠퇴하고 새로운 산업이 떠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무늬가 바뀌고 사람들은 바뀐 무늬를 보고 노동계급이 사라졌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환상입니다. 자본은 이윤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이윤은 착취당하는 노동계급 없이는 획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부터 다시 투쟁의 상승기가 도래하면서 계급의식도 전 사회로 확산하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1960~70년대에도 세계적으로 거대한 투쟁의 파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패배로 끝나자 노동계급은 큰 사기 저하를 겪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가 좌파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일부는 노동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끌렸습니다. 자본주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하는 온갖 이론들이 난무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계급이 더는 의미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위기의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계급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포스트모더니스트 지식인들도 요즘에는 대학에서 자기 일자리를 지키려고 노동자로서 싸워야 하는 기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현실에서 노동계급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큽니다. 단지 전에 없던 새로운 집단들이 노동계급에 편입했기 때문에 과거의 노동계급과 달라 보이는 것뿐입니다. 새로 편입한 집단들도 21세기에 노동자로서 자기 권리를 지키려면 노동계급의 오랜 투쟁과 연대의 전통을 학습해야 합니다. 노동계급 내에서 소수인 혁명가들은 이 새로운 집단의 학습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혁명가들은 ‘그래, 당신들은 노동자가 맞고, 따라서 당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자본주의가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막으려면 동료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막식에서 자동차 노동자, 언론 노동자, 그리고 교육 노동자가 함께 연단에 선 것은 매우 뜻 깊었습니다. 새로운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보여 주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노동계급에는 그들 외에도 섬유 노동자, 극도로 가난한 여성 노동자, 극도의 악조건에 처한 수많은 다른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노동계급 운동에는 이런 노동자들이 동참해야 합니다. 운동을 조직할 시간과 능력과 열정이 좀더 남아도는 노동자들이 그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운동을 건설하려면 노동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노동계급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장은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영국 지배자들은 우리가 모두 중산층이라고 말하는데, 재밌게도 그들은 경제 위기를 해결한답시고 기를 쓰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중산층’ 이하로 떨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질의응답
기후변화에 대한 시장주의적 해결책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깊이 논하자면 2시간은 족히 필요할 테니 짤막하게만 답하겠습니다. 온실 가스가 기후 변화를 초래하고 있고 그로 인해 인류에게만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피해가 간다는 것을 전 세계 지배자들이 알아차렸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문제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련한 어떤 수치를 보더라도 그들이 취하고 있는 조처들은 기후 변화를 막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단일 자본이 아닌 다수의 상호 경쟁하는 자본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기후변화 대책을 지지한다고 말하다가도 이윤에 타격이 될 거라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이번 경제 위기가 처음 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경제 위기가 대안적인 생산 방식으로 전환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녹색 기술에 대한 투자가 늘기는커녕 줄어들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속에서 개별 기업들은 이윤을 벌어들여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녹색 기술이 이윤에 타격이 된다면 그들로서는 그것을 폐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상 자본가들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안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가 절벽으로 돌진하고 있는데 운전기사는 브레이크를 살짝만 밟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물론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싶지만 자본주의가 세상을 파괴하길 스스로 멈춘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맙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냉정히 보자면 이대로는 자본주의가 정말로 세상을 파괴하고 말 것이 뻔합니다.
기계화·자동화로 인해 노동계급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새로운 기계를 도입할 때마다 그 기계를 조작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 현실입니다. 자동차 공장들은 30년 전에 비해 더 적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지만, 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30년 전과 마찬가지 효과를 냅니다. 그와 동시에, 더 적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장들도 다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그만큼 더 많이 의존하게 됐습니다. 거의 컴퓨터만으로 가동되는 공장이 있다 해도 그 컴퓨터를 만들 노동자들이 필요합니다. 또한 컴퓨터를 만드는 노동자들은 읽고 쓸 줄 알고 수학을 잘해야 하는데, 그런 노동자들을 양성하려면 교사들이 그만큼 더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값비싼 노동력이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자본가들은 마치 기계를 수리하듯이 노동자들을 수리해 줄 병원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50년 전이나 1백년 전보다 오늘날 기계화가 훨씬 더 진척됐지만 노동계급은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급의식의 발전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질문은 노동계급과 계급의식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영국 노동자들은 왜 귀족들과 왕실의 존재를 용인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저로서도 구역질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균등하지 않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모순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을 체험한 적이 없고, 따라서 생애 대부분 동안은 자본주의적 사상을 수용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오랜 세월 동안 자본주의 하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당연시하며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또한 주기적으로 노동자들을 투쟁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가며, 그러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사상들을 발전시킵니다. 그래서 노동계급 내에는 두 종류의 사상이 공존합니다. 한편에는 지배계급의 사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투쟁 속에서 발전한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노동계급 전체에 퍼져 있지만 불균등한 배합으로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작업장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소수가 있는가 하면 본능적으로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소수가 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사상도 일부 수용하고 반자본주의적 사상도 일부 수용합니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를 모순적 의식이라고 불렀습니다. 모순적 의식이란, 기존 질서 내에서 자란 계급이 기존 질서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기에 의문을 던지는 것을 말합니다. 노동자 계급뿐 아니라 봉건제 후기의 부르주아지도 모순적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사상에 도전하는 한편, 자기 딸들을 봉건 귀족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도 자본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기에 도전합니다. 유럽의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도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을 표방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합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때로는 [노동자들의 의식이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것 같아도 그들과 깊이 대화해 보면 기저에 면면히 흐르는 반자본주의적 전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자본주의에 도전할 때는 집단적 해결책, 상호부조, 연대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반자본주의적 관념들이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오직 투쟁의 경험 속에서입니다. 투쟁에 당장 동참하지 않고 있는 노동자들은 얼핏 보기에 지배계급의 모든 사상을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노동자들이 투쟁에 동참하는 순간 단결과 연대와 호혜주의를 얘기하기 시작하고 당면한 투쟁에서 승리할 힘뿐 아니라 세상을 바꿀 힘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자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반자본주의 전통은 노동계급에게 체화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 집단에게 균등하게 체화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노동자들의 혁명 조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혁명 조직을 만들려면 이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국의 모든 일터에 존재하는, 본능적으로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소수를 규합해야 합니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직장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느 작업장에나 체제에 맞선 투쟁 본능이 있는 노동자들이 꼭 있습니다. 어느 학교에나 그런 학생들이 소수는 있습니다. 거대한 투쟁이 분출할 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운동을 전진시키려 하는 거리의 지도자들로 떠오를 것입니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싸우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투쟁에서는 항상 기존 질서를 뛰어넘으려 하는 사람들과 기존 질서의 틀 속에 운동을 가두려 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논쟁에서 자본주의 언론들은 항상 후자를 편들고 조직합니다. 영국에서는 오늘날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경제 위기 때마다 주요 영국 언론들은 이민자들을 속죄양 삼으려 합니다. 반면 우리는 산업 자본가들과 금융 자본가들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영국의 모든 작업장에도 이민자들이 아니라 산업 자본가들과 금융권이 경제 위기의 원흉임을 알고 있는 유럽계[비이민자] 영국인 노동자들이 소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러한 소수의 노동자들을 규합해서 이민자들을 속죄양 삼는 주장에 맞서 싸워 승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함의가 있습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이민자 책임론을 받아들인다면 결국 노동자들끼리 싸우게 될 것이고 자본가들이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 위기의 책임이 자본가들에게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공장 점거와 파업과 시위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의 의식은 바뀝니다. 영국에서는 강력한 파업이 벌어지면 거기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활짝 웃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년 전에는 교사들의 하루 파업이 있었는데 모든 교사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좌파적 구호를 외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단 하루라도 윗사람들에게서 해방된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의 사명은 그러한 자신감을 더욱 키우는 것입니다. 하루 동안 그렇게 해방감을 맛보았던 교사들도 다음 날 학교에 돌아가면 다시 의기소침해지고, 체제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동료 교사들이나 학생들에게 분풀이를 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논쟁을 벌여야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정부에 맞서 승리하고 언론노조도 승리한다면 모든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 시대에 싸울 수 있는 자신감을 약간이라도 더 얻을 것입니다. 반면 자본가들로서는 자기들의 사상을 일반인들에게 전파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쌍용차와 언론 노동자들이 패배한다면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노동자들은 더는 싸울 힘이 없다’는 등의 얘기가 나올 것입니다. 특히 노동자들이 결정적 패배를 당했을 때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수 년, 심지어 십수 년이 걸리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르주아지는 어느날 갑자기 들고 일어나서 봉건제를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그 과정은 사오백 년이 걸렸습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데는 사오백 년이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류에겐 그만한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몇 차례 난관에 빠진다 해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난관 이후에 무엇이 올지는 우리의 실천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