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훈 씨가 쓴 〈레프트21〉 21호 독자편지 ‘전교조 비판을 완전히 삼갈 수는 없다’에 이견이 있다.
청소년들이 민주적으로 학교를 통제하고 학교 운영에 개입하는 것은 혁명이나 혹은 그것에 준하는 거대한 투쟁과 맞물릴 때야만 가능할 것이다. 청소년들은 대학생들과 처지가 또 다르다. 예를 들어 1987년 거대한 투쟁이 벌어져 대학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학생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학교 운영에 실질적인 개입을 했을 때조차 중고등학교에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교원평가 쟁점은 투쟁의 전략·전술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만약 학생들이 교원평가와 민주적 통제를 요구로 내걸고 싸우고 있다면 전술의 관점에서 교사들과 학생들의 투쟁이 연대하고 결합할 수 있도록, 두 집단 모두의 약점을 비판하고 연대를 촉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민주적 통제와 교원 평가의 필요성은 단지 선전의 문제라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강동훈 기자가 정규직 노동조합과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사례를 든 것은 적절치 않다. 왜냐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재 벌어지고 있고 정규직 노동조합 지도부의 보수적 태도가 현실 투쟁에서 실제 문제기 때문이다.)
지금 핵심 대립 구도와 투쟁은 정부의 교원평가제 도입과 그것에 맞선 전교조 교사들의 투쟁이다. 그렇다면 좌파들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게다가 지금 초점이 되고 있는 정부의 공세에 맞선 교사들의 투쟁이 패배한다면 학교에서 억압이 더 강화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강동훈 씨는 “학생·학부모 들이 교사 평가를 비롯한 민주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에는 사회 진보의 열망이 담겨있”기 때문에 단지 선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주장을 내놓을 때는 때와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부 종파들을 제외한다면 십중팔구 “테러리즘”에도 반대할 것이다. 맑스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제국주의 전쟁광들이 “테러리즘”을 반대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테러리즘”은 전쟁을 종식하는 효과적 수단이 아닐 뿐더러, 지배계급이 공세를 강화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대중을 하찮게 여기는 영웅주의를 부추길 뿐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주장이 포함돼 있다고 해서 전쟁과 테러리즘 모두를 반대한다고 주장해야 하나? 핵심적 주장은 바로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테러리즘을 비판하는 것은 선전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