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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급진 사상가 ③:
어떤 세력이 지젝이 말한 ‘적대’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번 마지막 칼럼에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사상과 한계를 살펴본다.

슬라보예 지젝이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오늘날 대다수 학자들의 방식과는 다르다.

지젝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청중이 꽉 찬 강연장에서 연설하고, 〈라디오 4〉 ‘투데이’ 프로그램[영국 BBC의 방송 채널]에 나와 인터뷰하고, 자신의 사상을 다룬 영화에서 주연을 맡는 등 가장 대중적인 급진 지식인이라 부를 만하다.

지젝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농담, 대중문화 이야기를 혼합해 오늘날의 굵직한 문제들을 탐구하는 놀라운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이 비타협적·독창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학계에서 득세하는 자유주의 사상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도전한다는 점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다.

미국 노동계급의 상당수가 영향을 받는 종교적 보수주의를 예로 들어 보자. 자유주의자들은 종교적 보수주의를 무지몽매함이나, 어쩌면 게으름에서 비롯하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신념이라고 말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신념은 모두 [저마다] 특수한 담론이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잣대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지젝은 이런 신념이 고통과 불안에서 비롯한 현실적 근심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이런 신념을 전이된 형태의 계급의식, 즉 문제의 진정한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양상이라고 생각한다.

지젝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으로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의식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만, 자유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내세우는 ‘계급은 끝났다’는 주장과는 거리를 둔다.

지젝이 보기에 계급투쟁은 사회 현실이 조화로운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런 견해에서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사상적 영향이 드러난다.

라캉은 무의식의 상징적 질서가 인간 존재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이 질서가 상징적 ‘현실’을 만들어 내 사회를 유지시키지만, 이 질서는 근본적으로 불안정·불완전하다고 한다.

라캉은 무의식이 상징화의 영역을 넘어서는 지점들이 있다고 본다. 이 지점들이 ‘실재계’다. [라캉은 현실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상상계는 이미지의 영역, 상징계는 언어로 의미가 창출되는 영역, 실재계는 현실 바깥이 아니라 현실 내부의 영역이지만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다.]

지젝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을 상징적 ‘현실’ 속의 ‘실재계’와 비슷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처럼 다소 모호한 개념 탓에 지젝은 모종의 사회적 이상 현상이나 저항을 모두 계급투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지젝은 최근 어떤 글에서 반자본주의자들이 주목해야 하는 몇몇 핵심 ‘적대’로 생태적 재앙, 지적재산권, 유전공학,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를 거론한 바 있다.

지젝은 “배제된 사람들”, 특히 남반구의 거대한 슬럼에 사는 사람들이 새로운 혁명적 주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문제는 지젝이 강조하는 쟁점이나 집단이 아니다. 그가 노동계급(자본이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 의존하는 계급)을 무시한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핵심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지젝이 말한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해관계와 능력이 있는 사회 세력은 누구인가?

지젝은 실재계의 표현인 사회적 적대를 주목하기 때문에 레닌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하다. 지젝은 레닌을 이런 적대의 화신으로 묘사하면서, 혁명적 전략·전술가의 대가인 레닌이 “사회를 무자비한 권력투쟁의 장”으로 여겼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레닌주의를 현실의 노동계급(레닌이 투쟁의 능동적 주체로 본)과 전혀 상관없는 권력투쟁으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지젝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다르게 보면서도 그 둘의 본질적 차이를 늘 분명하게 밝히지는 못하는 것이다.

지젝은 1920년대 말 러시아의 강제집산화가 1917년 혁명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했다. 혁명과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레닌에게 혁명 전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자신감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런 일을 하려고 노동자들 속에서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세계 변혁을 돕는 유용한 도구가 되려면 현실의 노동자 투쟁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이론과 실천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풍부해질 수 있다.

오직 혁명정당을 통해서만 이런 일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절실하게 필요한 지금, 급진 이론은 여전히 칼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에 답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번역 이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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