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급진 사상가들 ①:
네그리의 자율주의 사상은 전략의 필요성을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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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 기사에서는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사상의 부흥을 주도하는 주요 사상가들인 안토니오 네그리,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의 사상이 오늘날 투쟁에서 얼마나 유용한지 차례로 평가해 보려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마이클 하트와 함께 《제국》의 공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네그리는 1970년대부터 이탈리아 급진 좌파들 속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네그리 사상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바탕으로 한다.
칼 마르크스는 어떻게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되고, 그래서 사회를 변혁하는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게 되는지 살펴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네그리는 이런 생각을 뒤집었다. 그는 초기 저작에서 노동계급이 태생적으로 반(反)자본주의적이라고 주장했다.
네그리는 노동하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계급인 노동계급이 본래 창의성과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므로 세계의 진정한 생산력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은 이 생산력에 대한 2차 반응이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노동계급의 활력과 삶을 포획하려 한다는 것이다. 네그리는 “노동계급은 주체성, 즉 발전·위기·이행·코뮤니즘을 불러일으키는 분절된 주체성”이라고 주장했다.
최근에 네그리는 《제국》과 《다중》 같은 저작에서 노동계급을 더 광범하고 모호한 개념인 “다중”으로 대체한다.
다중 개념은 우리가 “탈(脫)산업” 사회에 살고 있다는 네그리의 생각을 반영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더 창조적이고 서로 소통하는 노동 형태가 우세한데, 우리의 고유한 권력[또는 역능(力能)] 때문에 자본은 이런 노동 형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절
그러나 이런 생각 탓에 네그리의 이론에서는 진정한 계급투쟁 개념이 사실상 사라져 버린다. 네그리는 최근 이렇게 썼다. “혁명적 단절은 이미 일어났다. 다중이 모든 것이고, 자본주의 권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네그리 사상의 실천적 결론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급진 세력을 건설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네그리는 “다중”의 투쟁이 자본주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견해로는 오늘날 경제 위기를 설명할 수 없다. 만약 네그리의 생각이 옳다면 오늘날 위기의 핵심부인 미국에서 자본은 수세적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 지배계급은 이윤을 증대시키고 노동조합을 길들이고 노동시간을 늘리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경제 위기를 이해하려면, 네그리가 거듭 무시해 온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자본들 간 무질서하고 무계획적인 “수평적” 경쟁과, 자본과 노동 간 “수직적” 투쟁이 상호작용한다.
네그리는 “다중”은 본래 창조적이고 자본은 이런 “다중”에 반응할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래 노동력 착취가 지속되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노동자가 생산물·기계·서비스를 모두 만들어 내고 자본가는 이것을 이용해 이윤을 얻지만, 무엇을 만들지 또 그것을 어떻게 만들지는 여전히 자본가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윤을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고, 이 때문에 인간과 지구에 재앙이 닥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다. 즉, 직접생산자들이 노동 과정과 노동생산물을 통제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결과다.
인간 노동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려면, 노동계급의 대중 행동으로 기업주들의 생산수단 소유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소유 관계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 최근에 벌어진 작업장 점거와 파업 투쟁 들은 그런 도전이 어떻게 전개될지 힐끗 보여 줬다.
안타깝게도 네그리의 주장은 이런 과제 해결에 필요한 전략적 방향을 거의 제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전투가 이미 끝났다고 암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출처: 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
번역: 이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