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오바마 시대 북미 관계는 어디로?
〈노동자 연대〉 구독
이 글은 《마르크스21》 4호
많은 이들이 오바마 정부 들어 북미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2009년 한 해 동안 북미 관계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을 둘러싼 첨예한 긴장 속에서 살얼음판을 걸었다.
물론 이런 경색 분위기는 하반기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방북한 이후, 북미 간 대화 조짐이 나타났다. 특히 12월 8일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북한을 방문한 전후로 북미 관계 개선 기대감이 매우 높아졌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왜 생겼는가? 그리고 앞으로 북미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에 비판적이던 오바마
북미 관계가 대화 국면으로 바뀐 것은 부시의 대북 정책 실패와 관련 있다.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은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이 북한과 맺었던 합의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심지어 2002년 북한을 이란
당시 북한 관료들이 느낀 공포심은 이라크 전쟁 직후 발표한 북한 외무성 성명에 잘 드러나 있다.
북한 당국이 말한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미국 지배계급 내의 비판은 이미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훨씬 전부터 제기됐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 미국 지배계급 내의 전략가들 중 상당수가 이런 비판에 동참했고, 이런 비판 때문에 네오콘이 대외정책 일선에서 후퇴해야 했다. 비판의 핵심 키워드는 이라크 전쟁 실패였다. 너무나 명분도 없고 군사적으로도 실패한 전쟁이라서, 전쟁 과정에서 동맹국들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국제적으로 위신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의 실패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행동을 제약하기도 했다. 부시 정부와 네오콘들은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중국 봉쇄 전략을 세웠는데, 현실에서 부시 정부는 많은 문제를 두고 중국과 타협해야만 했다. 북한을 대할 때도 핵선제공격과 같은 무시무시한 엄포를 실행에 옮기기는커녕 종종 북한과 협상장에서 얼굴을 맞대야 했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북한에 양보안도 내놓아야 했다. 이라크 전쟁 실패를 어떻게든 만회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중동 전선 밖의 문제는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부시 정부 하에서 북미 관계는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북한의 행동을 단속하고 잠시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곤 했지만, 부시 정부는 북한을 어떻게 대할지 분명한 전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래서 협상과 제재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심지어 협상이 끝나자마자 약속 사항을 번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북한은 미국이 아무리 협상장에 나섰다 해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라크 전쟁 때문에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기 어렵다는 점을 안 북한은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핵과 미사일 카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시 재선 후 얼마 되지 않은 2005년 2월 북한은 공식적으로 핵무장 선언을 했고, 그 해 9월 베이징에서 채택한 공동 성명을 부시가 휴지조각처럼 여기고 금융제재를 추진하자 2006년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오바마는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오바마는 부시 정부가 실제로는 군사적으로 공격하지도 못할 거면서 초기에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이 북한을 자극했다고 본다. 그리고 2기 부시 정부 때 미국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정권 말기까지도 부시 정부가 뚜렷한 대북 정책 없이 북한에 끌려다녀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지도 못하면서 미국의 체면만 구겼다고 본다. 그래서 오바마의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 강령에서 이란에 대해서는
북한의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
그럼에도 북미 관계가 처음부터 대화 국면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동안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둘러싼 첨예한 긴장이 지속됐다.
오바마 집권을 계기로 북한 당국은 미국의 대북 정책이 달라져 관계가 개선되기를 기대했던 듯하다. 오바마 정부도 북한과 대화에 나설 생각은 있었지만, 문제는 그보다 다급한 일들이 오바마에게 많았다는 것이다.
우선, 오바마에게는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시급히 진화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부시가 남긴 유산인
그러다 보니 오바마 정부에게 북한은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북미 관계에서 당장은 변화보다 현상 유지를 택했다. 부시 정부 말기에 미국은 북한과 협상에 나서곤 했고 협상에서 몇몇 양보 조처를 취하면서도 여전히 압박을 병행했다. 오바마는 초기에 이런 일관성 없는 대북 정책을 그대로 유지한 셈이었다. 북한과 협상할 의향이 있다면서도, 부시 정부가 북한에 요구한
오바마가 부시와 다른 대북 정책을 펼지 반신반의하던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정책에 큰 변화가 없는 듯하자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했다. 지난 18년 동안 미국의 압박에 시달려 온 북한으로서는 점점 참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제 오바마도 부시처럼 북미 관계 개선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북한은 미사일과 핵을 이용해 미국의 처지를 곤혹스럽게 할 것이라고 시위한 것이었다.
그 뒤 오바마는 북한 기업 3개를 상대로 제재를 추가하고 다른 강대국들까지 동원해 북한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명분 없는 것이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발사한 물체가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동안 인공위성을 스타워즈 계획 등 군사적 용도로 사용해 온 미국이 북한을 비난하는 것은
실제 북한은 외무성 성명에서 밝혔듯이, 미국이
대화 국면으로 전환
이렇듯 2009년 상반기 동안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하던 북미 관계는 북한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 두 명을 석방하고자 빌 클린턴이 방북한 뒤로 조금씩 변화 조짐이 생겼다. 물론 미국은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하려고 여러 구상을 재보고 동맹들을 다독이느라 실제 협상에 나서기까지 시간을 꽤 끌기는 했지만, 북미 관계가 점차 협상 국면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한 듯했다.
오바마로서도 북한의 로켓 발사와 핵실험에 아무런 강경 대응을 하지 않으면
우선,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할 처지가 못 된다. 중동 한 지역에서 벌이는 전쟁에서도 승기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선을 확대할 여력이 없다. 심지어 주한미군조차 중동 전선으로 차출해야 할 지경이다. 설령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더라도,
경제적
이명박 정부와 우파들은 북미 관계가 대화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 이와 같은 강력한 제재의 효과라고 대북 강경 정책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실제 제재 효과는 미미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제재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년은
북핵 실험 초기에 중국은 북한이 자신의 앞마당에서 불안정을 키워 미국에게 개입 명분을 주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국의 뜻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것이 부담스러워 유엔 결의안을 지지하고 제재에 동참하는 듯했다. 그러나 북한을 미국과의 정면 충돌을 막아주는 완충지대로 여기는 중국은 취약해진 북한 체제가 제재 때문에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실제로는 제재에 힘을 싣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김하영이 북한 로켓 발사 직후 일찌감치 예측했듯이, 미국은
보즈워스 방북 결과
그러나 협상이 순탄히 진행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보즈워스와 북한 당국은 방북 직후 회담이
북미 관계 개선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은 이번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어한다. 가령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장창준 연구위원은 이번 회담이
그러나 북한과 미국이
게다가 보즈워스 방북 직후 발생한 무기 선적 화물여객기 수색 사건은 북미 관계 개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미국은 북한을 출발한 무기 선적 의심 화물여객기 정보를 태국에 넘겨 수색하게 했는데, 미국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면서도 제재 등 압박 수위를 낮추지 않겠다고 경고한 것이라고 말했다.6 이미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나온 미국 신안보센터CNAS 보고서를 보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므로 미국은 협상 와중에도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물론 단기적으로 미국이
그러나 지난 20년 간 북미 관계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이런 합의를
클린턴 대북 정책의 양면성
많은 개혁 성향 한반도 전문가들은 오바마 정부의 대외정책 담당 각료들이 대체로 클린턴 정부와 연속성이 있다는 점 때문에, 오바마 정부를 클린턴 정부와 비교하곤 한다. 그리고 클린턴 정부 때 북미 제네바 합의와 북미 공동 코뮤니케와 같은 북미 관계 개선을 담은 중요한 합의가 있었다는 이유로 오바마 정부에서 북미 관계가 근본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가로 미국이 경수로 두 기 건설을 지원하고 중유를 제공하기로 한 합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클린턴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이 거둔 성과라고 평가했고, 지금도 바로 이런 정책이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정책으로 계승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가 일관되게 대북 포용 정책을 구사했다고 보는 것은 제네바 합의 직전까지 미국이 핵 위협을 빌미로 북한을 압박했고 그러한 압박이 북미 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까지 발전했다는 점을 외면하는 것이다. 1992년부터 미국이 북한 핵 의혹을 부추기자, 이에 반발한 북한이 1993년에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북미 간 위기가 고조됐다. 북미 간 핵협상이 열렸지만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곧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은 윌리엄 페리였는데, 그는 1999년 북미 협상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동결하면 단계적으로 보상한다는
이 위기는 북미 제네바 합의로 몇 년 간 봉합됐다. 왜 갑자기 전쟁 위기가 회담으로 전환됐는가? 사람들은 대체로 전 대통령 카터의 방북이 전쟁을 피하게 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카터가 방북해서 6월에 회담이 재개되긴 했지만, 당시 카터의 방북에 많은 강경파들이 반발했고, 그 결과 대북 제재 국면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북미 합의가 결정적으로 진척된 이유는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과 관련 있었다.8
이미 북한은 1980년대부터 경제 위기를 겪어 1990년대 초에는 위기가 극심해졌는데, 김일성의 사망으로 미국은 북한 체제가 급속히 붕괴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게 됐던 것이다. 미국은 북한 체제 붕괴가 남한
북미 제네바 합의로 북미 간
이렇듯 대북 포용 정책을 폈다고 평가되는 클린턴 정부는 실제로는 미국의 세계 패권 유지 목적에 따라 강경 정책과 유화 정책을 롤러코스터 타듯이 급격히 바꿔가며 사용했다. 그리고 이 위기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북한을 둘러싼 위기의 배경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북한을 둘러싼 위기는 왜 지난 20년 동안 계속됐는가?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해 세계 평화를 위협해 왔기 때문인가?
물론 북한 관료들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사이에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자고 결심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의 근본 원인을 북한의 호전성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게 된 것은 냉전 해체 무렵의 세계 질서 변화와 관련 있다.
1991년까지 남한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는 수백 기에 달했고, 1976년부터는 북한과 핵전쟁을 벌일 것을 염두에 둔
우파들은 1991년 미국이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한 이상 북한의 핵무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남한 영토에서 핵무기를 철수했어도 미국의 핵우산은 남한에 계속 보장됐다. 게다가 북한은 1991년 걸프 전쟁을 보고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약소국을 군사적으로 초토화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실제 걸프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던 콜린 파월은 승전 직후
이런 정황이 북한으로 하여금
즉, 약 20년 전부터 북한 위기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북한보다 미국의 책임이 비할 바 없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북한을 둘러싸고 위기를 의도적으로 부추겼는가? 이는 걸프전이 발생하게 된 요인과도 연관 있다. 바로 냉전 해체 이후 더 불안정해진 세계 질서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할 방도와 관련 있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냉전 해체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고 봤지만, 실제로 미국은 냉전 해체 무렵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군사적으로는 유일 초강대국이 됐지만, 냉전 기간에 미국의 경제적 위상은 계속 하락했다. 반면 일본과 독일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엄청난 경제적 성과를 거뒀다. 그 결과 냉전 해체 무렵 미국의 지위를 넘볼 잠재적 강대국이 여럿 등장하게 됐다.
그래서 미국 지배계급은 냉전 해체 이후에도 다른 강대국들이 미국의 세계 패권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데 주력하게 됐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는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는 일본
1980년대까지 이런 경제 성장의 견인차는 바로 일본이었다. 이 때문에 냉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은 일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본이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 부상한 경제력에 부합할 군사 대국화를 추진한다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위를 넘볼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냉전 해체 전만 해도 소련 블록이라는 가시적 위협이 존재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묶어놓을 수 있었지만, 냉전이 해체된 뒤로는 이런 명분도 사라지게 됐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냉전 해체 전후로 북한의 핵무장 의도를 의심하게 된 미국은 이것이 미국 주도의 핵독점 체제에 균열을 일으킬까 봐 우려했다. 가뜩이나 냉전 기간에 경제적으로 미국을 추격하던 일본이 북핵 위협을 빌미로 독자적 핵무장에 나선다면 일본이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미국은 북한을
일본을 동맹으로 묶어두려는 미국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1999년 일본은 MD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도 미국 지배계급에게 골칫거리다. 중국은 특히 일본이 불황의 늪으로 빠져든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매년 10퍼센트 안팎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 게다가 문제는 중국이 경제 성장과 함께 군사력 증강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중국은 해군력과 공군력을 대폭 강화하고, 미국을 겨냥한 듯이 인공위성을 격추시킬 정도로 미사일 기술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외교 전략은 중국 포위에 맞춰져 있었다.
세계경제 위기와 ‘테러와의 전쟁’
미국 지배계급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인 민주당 소속 대통령으로서 오바마도 냉전 해체 이후 미국 지배계급이 설계하는 세계 전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부시가 남긴 두 가지 유산을 더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먼저, 세계경제 위기가 대외정책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자. 몇 년 전에만 해도 오늘날의 세계를 미국 유일 초강대국이 지배하는 일극 체제로 보는 견해가 다수였는데, 세계경제 위기 상황이 점쳐지면서 미국 패권 몰락과 다극 체제 도래라는 화두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의 경제력은 냉전 기간 내내 쇠퇴해 왔지만,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의 여파로 미국 헤게모니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 더 두드러지게 됐다.
이런 변화를 두고, 많은 분석가들은 미국이 협력적 대외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북아에서 권력 재편이 일어나면서 어떤 나라도 질서와 규범을 강제하는 패권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반면에,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 오바마는 부시처럼 제국 건설을 시도하기보다는 협력적 다자주의와 리더십 회복을 통한 세계 전략을 공언하고 있다. 이는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 경향이 퇴조하고 협조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10
이런 분석은 특히 미중 관계를 전망하는 데 적용되곤 하는데, 경제 위기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의 미국 국채 매입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 두 나라 사이에 협력적 관계를 강제한다고 본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에 의존해야 하는 정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협력 일변도로 나아가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미국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패권 유지에 위기감을 느낄수록 겉으로는 중국 등과 협력적 제스처를 취할지라도 실제로는 더 치열하게 견제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이윤 경쟁을 위한 국가 간 정치적
그런데 그러한 경제적 상호 의존이 외교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군사적 충돌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인지의 문제는 남아 있다. 역사적 증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심지어 순전히 경제적인 경쟁조차 경제 영역에만 한정될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상호 의존
— 언제나 경제적 협력뿐 아니라 경제적 경쟁도 수반하는 — 이었다. 그러한 긴장들은 어느 시점에서는 국가들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했다. 제1차세계대전의 경우 전 세계 상당수 국가들이 경제 관계의 토대를 재편하기 위한 무기로 군사 행동을 선택하는 바람에 세계적 충돌이 일어났다. 중국이 공업화하고 있는 세계적 환경은 더 장기적으로는 그러한 충돌의 가능성을 더 크게 만든다. 미국이 대중국 투자와 재정 적자 해결을 위해 중국의 재원 조달에 의존하면 할수록, 미국은 이러한 경제적 생명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군사력 사용이 더욱더 절실해질 것이다.12
단기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한편 오바마가 부시에게서 물려받은 다른 하나의 유산은
오바마의 미국도 당분간 중동 전선에 집중해야 하므로, 단기적으로 북한을 상대로 전면적 강경책을 구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북미 관계가 마냥 순탄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앞으로의 북미 관계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협상과 합의, 합의 파기와 강경 대응 등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동아시아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각축장인 데다, 미국이 냉전 해체 이후 자신의 세계 패권을 지키고자 이곳에 계속 개입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불거지는 강대국들 사이의 갈등이 앞으로도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표면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만약 세계경제 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심각해지고, 강대국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져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데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다면, 중동 전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카드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구적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강대국들 때문에 강제로 분단되고 같은 민족끼리 끔찍한 전쟁을 치른 한반도 민중은 평화 열망이 강하다. 그러나 지난 20년 간 북미 관계는 전쟁 위기를 포함해 수많은 갈등을 겪는 등 민중의 열망과는 어긋났다. 따라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항구적 평화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 이런 열망이 평화협정 체결 기대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평화협정 체결 요구는 지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평화협정이 진정한 평화체제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 가지 이유는 북미 간이든 남북미중 4자 간이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당사자 중 하나인 미국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죽하면 리영희 선생은 2005년 9
사실, 미국의 북한 위협은 정전협정 체제와 같은
설령 평화협정이
이미 미국과 남한은 주한미군의 영구 주둔을 꾀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 한국은 주한미군을 놓고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는데, 이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확대하고 영구 주둔의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의하면, 주한미군은 앞으로 단지 북한의 대남 공격에 대항하는 방어 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국 등 지역 강대국들을 겨냥해 동아시아 지역에 개입하고 더 나아가
사실, 북한조차 평화협정 체결 이후 주한미군이 반드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다. 2000년 6
주한미군의 구실 변경은 한반도 영토가 미중 간 군사적 충돌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는 위험천만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런데 북미 간이든 남북미중 간이든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체제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평화협정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좌파 민족주의 활동가들 중 일부는 북한의 선군정치와 뛰어난 외교력이 미국을 근본적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지금까지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 낸 것도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와 핵실험, 그리고
게다가 핵군축을 위해 핵개발을 한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 등 강대국들의 핵에 비하면 훨씬 작은 위험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일본과 남한 등 동아시아 주변국들의 핵 개발과 경쟁을 자극할 수 있다. 이런 핵 경쟁은 동아시아를 끔찍한 핵전쟁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리고 민중은 이런 끔찍한 군비 경쟁에 쏟아부을 천문학적 비용 때문에 복지 삭감 등 더한층 생존의 어려움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이미 북한 체제는 로켓 발사와 핵실험 등 자본주의의 군사적 경쟁 논리에 종속돼 주민들의 삶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강대국 간 경쟁이 치열한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가 도래하려면 근본적으로 세계 패권을 위해 강대국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체제, 즉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 이는 패권 경쟁 당사자들의 약속으로도, 북한 당국처럼 핵과 미사일을 이용해 제국주의 강대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항구적 평화가 가능하다면, 진보진영이 할 일은 그저 협상이 얼마나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에게는 이런 수동적 과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 변혁의 씨앗은 오늘날 경제 위기와 전쟁 등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낳는 여러 실패에 맞선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저항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 진영은 이런 저항에 방향타를 제공해 이를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발전시킬 임무가 있다. 이 과제가 성공할 때만 진정한 한반도 평화도 가능할 것이다.
주
1
2 미국 신안보센터,
3 같은 글.
4 김하영,
5 장창준,
6 Thomas Fuller & David E Sanger,
7 미국 신안보센터, 앞의 글.
8 김하영,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책벌레, 2003, 21쪽.
9 리언 시걸,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사회평론, 1999, 19~20쪽.
10 정욱식,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 레디앙, 2009, 222쪽.
11 같은 책, 223쪽.
12 존 리즈, 《새로운 제국주의와 저항》, 책갈피, 2008, 96쪽.
13 김하영,
14 〈워싱턴포스트〉
15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대격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