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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재장전》:
레닌에 대한 불충분한 통찰

故 크리스 하먼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전 중앙위원으로 《민중의 세계사》(책갈피),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책갈피, 공저)의 저자다.

이 책의 편집자들은 서문에서 “‘레닌’의 이름이 정확히 오늘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가능하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거의 없는 바로 이 시대에 말이다” 하고 이 책의 목적을 설명한다.

매우 훌륭한 목적이다. 그들이 지적했듯이, “마르크스로의 복귀는 이미 학계의 유행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세계 변화 프로젝트와 철저히 분리됐다. 그런 프로젝트에는 레닌이 구현한 활동가적인 정치 전통의 복원이 필요하다.

다니엘 벤사이드, 알렉스 캘리니코스, 앨런 샨드로가 쓴 글들에 이 말의 의미가 담겨 있다. 테리 이글튼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받는 사람들에 맞서 레닌을 매우 명료하게 방어한다. 근거 없이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을 신뢰하기에는 두려움이 너무 많았”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사바스 미카엘-마차스, 케빈 앤더슨, 스타티스 쿠벨라키스가 쓴 레닌과 철학을 다룬 글들은 제1차세계대전 발발 직후 레닌이 철학자 헤겔을 재강독한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레닌 재장전》, 다니엘 벤사이드·스타티스 쿠벨라키스·슬라보예 지젝·안토니오 네그리·알랭 바디우·알렉스 캘리니코스·테리 이글턴·프레드릭 제임슨 등·마티, 511쪽, 2만 2천 원

그러나 이 책의 나머지 글들은 대부분 그런 목적에 부합하지 못한다. 학술 회의들에 제출되는 많은 글들이 그렇듯이, 필자들은 상대방의 주장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 자기 견해만을 내놓는다. 레닌이 무엇을 주장했고, 정치적으로 어떻게 활동했으며 오늘날에도 유효한지를 놓고 완전히 다른 평가들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일부 ‘스타’ 필자들은 틀리거나 허무맹랑한 주장을 한다.

알랭 바디우(오늘날 일부 서클들에서 “학문적 유행”의 대상이다)는 레닌을 “문화혁명”을 이끈 마오의 선조로 묘사한다 — “문화혁명”은 위에서부터 학생들을 동원해 지식인·노동자·국가관료를 공격했지만, 국가의 군사 기구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레닌의 삶정치”가(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노동계급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레닌 사후의 새로운 모순들 속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실뱅 라자뤼스는 “혁명은 1968년에 쓸모없는 개념이 되어 버렸”고 “계급주의는 1968년에 사망했다”고 쓰면서도 동시에 레닌이 생전에 주장한 것을 찬양한다.

필자들이 서로 논쟁해 독자가 논지 전개를 이해하고 상이한 견해들을 판단할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런 견해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유일한 예외로,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세계를 바꾸려면 “추악한 짓”을 저질러야 한다고 호기롭게 주장하는 지젝의 “단호함”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래서 어떤 필자는 레닌의 철학이 프랑스의 스탈린주의자 루이 알튀세의 그것과 정반대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필자는 둘의 직접적 연속성을 주장한다. 어떤 필자는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 이론이 레닌의 것보다 오늘날 더 유효하다고 찬양하는 반면, 다른 필자는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안개 속을 지나가는 배들처럼, 다른 필자의 견해를 지지하거나 반대한다고 서로 주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돈 주고 이 책을 샀으니 누구 말이 옳은지도 돈 낸 사람이 알아서 판단하란 말이다.

필자의 논지를 모호하게 만드는 학술 용어들이 난무하고 종종 횡설수설로 끝난다.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점에서 둘의 세기는 하나를 향한 강렬한 욕망에 의해 활성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포퓰리즘의 요소들은 순수하게 형식적이고 초월적이며 실체적(ontic)인 게 아니다.”(ontic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단어다.) 라자뤼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건의 성격을 밝혀 주는 자료는 정치를 밝혀 주는 자료가 된다. 그렇게 탄생한 특이성의 정치는 더 이상 국가의 질서를 전복하지 않으며 효과만을 발휘한다.”

[영문판] 본문에는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스어가 번역되지 않은 채 곳곳에 있어, 마치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일수록 더 심오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내 경험상 거의 언제나 그 반대다).

마지막으로, 현실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시도에 검증되지 않은 정신분석학파의 주장을 결합시키려는 경향(바디우, 지젝, 제임슨의 글들에서 나타나는)이 있다.

그런 주장을 읽다 보면, 《공산당 선언》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자본주의 비판을 “철저하게 거세해 버린” “독일 학자들”의 “철학적 난센스”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통렬하게 비판한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레닌만큼 사상을 명료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사람도 없다 — 그는 유행하는 학술 용어에 조금치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가령, 레닌은 부하린의 《과도기 경제학》을 논평한 글에서 대체로 호의를 표했으면서도 부하린이 강단 사회학의 언어를 마르크스주의로 수입한 것을 비판했다. 그리고 외국어를 사용해 노동자들이 그 글을 읽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학술적 모호함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눈에 거슬려서가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들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적 장애물이다. 바디우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해 레닌이 폭력 그 자체에 열광했다는 인상을 준다. “극단적 폭력은 극단적 열광이 가진 상대적인 상관물이고, 정말로 시급한 것은 니체 식으로 말해 보자면, 모든 가치들의 가치 전환이다.” 이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소외 때문에 좌절한 중간계급 지식인인의 태도일 것이다. 한 세기 전 프랑스 작가 조르쥬 소렐도 비슷한 태도를 취했는데, 그의 ‘신화’는 일부 좌파만이 아니라 파시스트들도 고무했다. 이것은 레닌의 태도가 아니었다. 레닌은 때로 폭력의 사용이 필요하지만 미덕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지젝의 경우, 재치 있는 문구가 구체적 사태전개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을 대체한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주의로 종결”된 것이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쓴다. 그는 실제 벌어진 투쟁들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한다. 더 심한 문제는, 지젝이 “단순히 다문화주의적 개방만을 고집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가장 기만적인 형식”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 다문화주의 옹호가 중간계급의 관심사일 뿐 현대적이고 다인종적인 노동계급의 단결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바디우, 지젝, 네그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잔재에서 벗어나고 있는 학술 서클들에서 상당한 지지자들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이 책의 목적은 자신들의 명성을 이용해 그렇게 이동중인 사람들이 레닌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전받지 않는다면 나쁜 강단 마르크스주의가 훌륭하고 과학적이며 활동가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밀어낼 수 있다는 점이 걱정된다. 이 책이 강단 마르크스주의자와의 논쟁을 담았더라면 훨씬 더 유용했을 것이다. 아무런 논평없이 그들의 글을 소개하기보다 말이다. 진정으로 ‘재장전한 레닌’이었다면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도전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