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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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2년 동안 PSI 참가, 대북 지원 축소, 각종 호전적 발언 등 대북 강경 정책을 고수하던 정부가 연내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을 내비쳤다. 많은 이들은 이명박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도, 정상회담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이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런 심정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남북 정상회담이 정권의 정략에 이용된다고 해서, 진보진영이 정상회담을 반대할 수는 없다.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것은 마치 남북 적대를 지지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이는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민중의 정서와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이 자동으로 한반도 평화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우선 정상회담 결과는 북미 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북미 관계는 단기적으로 유화 국면이긴 해도, 세계경제 위기 상황에서 최근 미중 관계가 삐걱거리는 등 강대국 간 갈등이 낳는 불안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북미 관계가 나빠진다면, 얼마든지 남북 합의는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두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했지만 한반도 평화는 요원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남북 화해와 협력을 합의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은 미국의 대북 압박을 거스르지 못했다. 이는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하고 서해에서는 교전을 벌이는 식의 모순을 낳았다. 하물며 공식 정치를 우파가 주도하는 현 상황에서 남북 화해 국면이 오래 지속할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편, 진보진영은 정권이 정상회담을 정략적 목적에 이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벌써 6월 지방선거 전에 정상회담을 추진하느냐 마느냐가 초점이 되고 있는데, 이는 정략적 이용을 의심하는 정서가 그만큼 광범하다는 방증이다.
과거 남북 관계를 보면, 이런 우려가 괜한 것은 아니다. 남북한 정권은 남북 관계를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해 왔다. 경색 분위기와 유화 분위기 모두 통치에 이용했다.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의 선거 승리를 위해 남북한 정권이 공모해 판문점 총격 사건을 일으킨 것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국면에서 박정희와 김일성이 정권의 반대자들을 정치적으로 마비시킨 후 각각 유신헌법과 주석제를 채택한 것은 후자의 사례다.
정략적
남북 관계를 통치에 이용한 것은 우파만이 아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남북 정상회담은 정권의 정치 위기를 만회하고, 계급 갈등을 희석하는 데 이용됐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후, 진보진영 다수가 투쟁을 자제하는 국면에서 여름엔 롯데호텔노조와 사회보험노조의 파업에, 겨울엔 국민·주택은행 파업에 경찰력을 투입했다.
당시 노동자 투쟁보다 남북 화해를 중시한 좌파들은 정권의 노동자 운동 탄압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남북 화해를 위해서는 김대중 정부 같은 자유주의 세력들을 견인해야 한다고 여기다 보니, 잠재적으로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것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쌍용차·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선 것처럼, 올해도 경제 위기가 지속하면서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격에 맞선 저항이 계속될 것이다. 특히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올해 본격적으로 예고돼 있고, 사기업들도 임금삭감이나 해고 등을 밀어붙일 태세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은 남북 정상회담을 정치 위기를 만회하고, 노동자 투쟁을 고립시키는 호기로 이용하려 할 것이다. 과거 정상회담 국면에서 진보진영 다수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정상회담 국면에서 회담에 찬물을 끼얹지 말아야 한다며, 투쟁을 자제하거나 노동자 투쟁 지원 건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좌파 민족주의 경향은 ‘통일 정세 촉진’을 위해 통일 지향 정권이 필요하다며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려 할 수 있는데, 이는 부적절한 전략이다. 민주당은 근본에서 한반도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는 세력일 뿐 아니라,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세력이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보다 비할 바 없이 더 중요한 사회 변화의 동력은 노동계급의 투쟁이다. 노동계급은 자본가의 이윤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그럼으로써 노동계급은 자신과 여타 피억압 대중이 겪는 착취와 차별·억압을 낳는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에서 변혁해 경제 위기의 대안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한반도 불안정의 근원인 강대국들 간 경쟁적 세계 지배 체제(제국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세력도 국제 노동계급이다.
그러나 이것이 작업장 내 쟁점을 언제나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진보진영 내 노동자주의적 좌파들처럼 정상회담에 반대하거나 회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진보진영은 정상회담 국면에서 남북 자유 왕래 보장, 분단을 빌미로 유지돼 온 국가보안법 등 악법 철폐, 대북 식량 지원, 남북한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과 교류 보장, 주한미군 철수와 남북한 상호 군축 등을 독자적으로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요구들은 남북 정상이 보장하지 않는 요구지만,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민중의 열망에 부합하고 남북한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