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투사들이 한진중공업·금호타이어 노동자들에게:
점거파업의 교훈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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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언론들은 한진중공업·금호타이어 투쟁을 두고 “제 2의 쌍용차 사태”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대량해고에 맞선 노동자 투쟁이 강력한 점거 파업으로 이어질까 봐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쌍용차 파업은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모순적 효과를 내고 있다. 이 영웅적 투쟁은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일종의 ‘패배의 기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대량해고에 맞서 투쟁에 나선 한진중공업·금호타이어 노동자들 사이에선 ‘쌍용차처럼 격렬하게 싸우면 고립된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77일 간 파업을 벌인 쌍용차 투사들은 이것이 오해라고 말한다.
파업 직후 구속됐다가 지난 2월 12일 석방된 고동민 조합원은 보수 언론들이 쌍용차 파업을 거론하는 이유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정부와 언론들은 쌍용차처럼 싸우면 노조를 다 말살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거꾸로 그들이 [점거 파업을] 겁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우니까 오히려 불안감을 조성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난 1월 석방된 양형근 조합원은 “강력히 싸워서 고립된 것이 아니었다”면서 “점거 파업이 오히려 연대의 초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고동민 조합원은 연대에 나선 수많은 단체들, 노동자들, 촛불 네티즌들, 학생들을 떠올렸다.
“해고되고 구속되고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지만, 이런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어요. 우리 투쟁을 지지하고 엄호한 동지들 때문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점거 파업만큼 노동자들에게 단결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도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니까, 동지애가 생기고 투지가 커졌습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였던 것입니다.”
양형근 조합원은 한진중공업에서도 공장 점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합원들이 개별적으로 있으면 나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점거 파업을 통해 하나로 뭉쳐 있었기 때문에 힘이 생겼어요. 서로 격려하고 어깨 두들겨 주면서 갈 수 있었죠.”
노동자의 학교
쌍용차 파업이 고전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쌍용차 투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연대 부족을 지적했다. 박금석 전 쌍용차 지부장 직무대행은 특히 이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쌍용차 파업은 총자본과 정권에 맞선 투쟁의 대리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전면적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강력한 힘이 발동되지 못해 고립된 것입니다.”
쌍용차 파업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지도부는 ‘계급 대리전’ 성격에 걸맞는 광범한 노동자 연대를 조직하지 못했다.
고동민 조합원도 연대 투쟁 건설보다 양보 압박에 힘을 쏟은 금속노조 지도부를 비판했다.
“금속 지도부가 양보론을 얘기했는데, 이게 정말 싫었어요. 98년 현대차 파업에서도 양보에 매달려선 안 된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패착의 원인인 듯합니다. 처음에는 설마 2천6백46명을 전부 자르겠나 싶었는데, 자본은 정말로 모두 해고했습니다.”
양형근 조합원도 ‘선제적 양보론’을 비판했다.
“우리가 늦게 양보안을 내서 문제였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양보는] 소용 없는 일이에요. 얻는 것은 없이 현장만 혼란스러워지고 자신감만 다운됩니다. 게다가 한 번 양보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한진중공업 노조가 [사측이 요구하는] 무급휴직을 받아들여도 그걸로 끝이 아닐 겁니다. ”
그는 힘이 있을 때 단호하게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쌍용차 싸움을 두고 사람들이 패배의식을 가질까 봐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옳았습니다. 투쟁이 정당하다면 싸움을 주저해선 안 됩니다. 해고자 명단이 발표되기 전에, 힘이 있을 때 강력히 싸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