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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방안 논쟁:
‘돈 더 낼 테니 복지를 달라’는 요구가 위험한 까닭

1만 1천원의 기적은 가능한가? 6일 오전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준비위원회가 출범식을 가졌다

6월 9일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준비위원회(이하 시민회의)가 공식 출범했다.

‘시민회의’ 참여 인사들은 건강보험 보험료를 인상해 보장성을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한 사람당 1만 1천 원씩 보험료를 인상하면 현재 60퍼센트 대인 건강보험 보장성을 90퍼센트까지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즉시 이를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한번 입원한 환자들은 퇴원하려 하지 않으며 온갖 검사를 다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병원에서 지내는 것이 자기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낫다고 느끼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런 사람들조차 그토록 형편이 열악하다면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이들에게 지원을 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빈곤층이 늘어난 것 자체가 정부의 친기업·반서민 정책 때문이다.

포르투갈, 그리스, 아일랜드 등이 무상의료 때문에 경제가 파탄났다는 식의 주장도 완전한 헛소리다. 이번 경제 위기의 진원지는 무상의료와 한참 거리가 먼 미국이다.

그러나 복지를 늘리면 ‘도덕적 해이’가 팽배해진다는 주장이 〈조선일보〉 같은 우익의 전유물은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 복지부 장관이던 유시민도 비슷한 논리로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지원을 대폭 삭감한 바 있다. 그래서 병원을 전전하며 파스를 챙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그것마저 빼앗겼다.

건강보험 재정을 늘려야 한다며 이토록 악랄하게 굴고 보험료도 대폭 인상해 왔지만 그렇다고 보장성이 크게 늘어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늘린 재정으로 병원과 제약회사들의 배만 불려 왔을 뿐이다. 한국식 ‘제3의 길’인 ‘참여복지’는 그렇게 파산했다.

따라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려면 먼저 제약회사와 의료 기관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의료민영화는 이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의료민영화 저지 및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 배경이다.

제3의 길

그런데 ‘시민회의’는 보험료 인상을 최우선의 과제로 제시한다. ‘시민회의’는 이런 주장에 우려를 표하는 노동자들과 사회단체들을 터무니없이 “원리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동안 〈레프트21〉 같은 좌파적 반대 의견을 의식해 이번 발족 자료에서는 이런 비판이 상당히 누그러지기는 했다.

그러나 ‘시민회의’의 우선순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참여복지’식 논리가 더 발전했다.

“길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길을 외면해 왔을 뿐입니다. 정부, 사용자에게만 재정을 더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떠밀어 버리는 당위적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 재정의 획기적 확충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준비위원 참여 제안서)

‘당위’의 말뜻은 “마땅히 그렇게 하거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주들에게 마땅히 재정을 책임지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회의’는 반대로 노동자들에게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떠밀어 버리는” 정부의 논리를 강화해 주고 있다.

〈조선일보〉는 교활하게도 이 점을 노리고 ‘시민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이진석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건보 재정 건전화를 요구하면서도 재정 부담은 정부나 기업 탓으로만 돌리던 상황에서 이번엔 국민 개인 부담부터 촉구하고 나선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우파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반대하면서도 시민회의의 양보론의 약점을 파고들어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데 그 논리를 활용하려 한다. 이른바 이이제이자, 분열지배 수법이다.

‘시민회의’가 자신들의 활동을 강화할수록 이런 일은 더욱 빈번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는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갉아 먹고 진보진영의 활동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 것이다. 어떤 노동자들은 보험료 인상에 동의하겠지만 다른 노동자들은 반대할 것이다.

요컨대, 시민회의식 ‘대안’은 그 의도가 어떻든 실제로는 전체 운동을 분열·약화시키게 된다.

‘시민회의’가 현행 건강보험 제도의 장점을 지나치게 과장해 전임 정부의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것도 문제다.

현행 건강보험 제도가 “능력에 따라 재정을 모아서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는 제도”라거나 그동안 “보험료를 올리지 않았다면 보장률은 50퍼센트 대로 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듣노라면 울화가 치밀 정도다. “무상의료는 공짜 의료가 아니”라는 얘기도 거침없이 나온다.

‘시민회의’의 설명을 듣다 보면 한국의 건강보험 제도는 보장성 말고 더 개선할 것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전액 무상의료에 입원하면 상병 수당까지 지급하는 유럽 나라들의 사례는 얘기하지 않는다. 이 나라들에서는 기업주들이 내는 세금이나 보험료 비율이 월등히 높은데 ‘시민회의’는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는다.

현행 제도에 대한 진보적 비판을 삼가고 노동자들에게 보험료 인상을 요구하는 ‘시민회의’의 안은 정치적으로 민주당에 힘을 실어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전 정부 인사들의 참여도 이를 예고하는 듯하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늘어나지 않은 것은 기업주들이 복지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운동을 벌여 왔는데도 바뀌지 않은 것은 우리 운동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기업주들이 그토록 완강하게 버텨 왔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들의 편에 서 있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양보가 아니라 ‘당위적인’ 요구를 쟁취할 강력한 대중 동원력을 건설하는 것이다.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을 강화하고 정부와 기업주들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노동자 투쟁이 필요하다. 시민회의가 가리키는 길은 이 해결책과는 반대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