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칠레 ─ 또 다른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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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에 우리는 2001년 세계무역센터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1973년 칠레 쿠데타라는 또 다른 학살도 기억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배우는 것이다. 1973년 당시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조사는 그들이 그처럼 뼈아프게 대가를 치러야 했던 실수에서 끌어 낸 교훈일 것이다.
1970년 9월 살바도르 아옌데는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선두를 달렸다. 그는 겨우 36퍼센트를 득표했을 뿐이지만 반대파들의 분열 덕분에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은 전 세계에 엄청난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체 게바라가 죽은 뒤, 라틴 아메리카가 쿠바식 게릴라전으로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좌파 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식 길”을 말하기 시작했다. 논평가들은 아옌데를 “민주적으로 선출된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이라고 불렀고, 많은 좌파들도 그 말을 받아들였다.
당시에는 오직 소수만이 쓰라린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소셜리스트 워커〉의 스티브 제프리스는 아옌데 정부가 “후퇴하고 타협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제프리스는 만약 아옌데가 한계를 넘으면 “파업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았던 바로 그 군대가 지배계급이 투표를 통해 밀려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냉철하게 덧붙였다.
아옌데는 필요할 때마다 마르크스주의적 미사여구들을 조금씩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노련한 개량주의 정치인이었다. 그의 경제 전략은 전적으로 케인즈주의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틀에 도전하지 않은 채 경제를 부양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의회주의적 합법성을 철저하게 준수했다. 대통령 취임 전에 아옌데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교회, 교육 제도, 대중 매체…군대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보장법”에 서명했다. 그는 적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가지고 경기를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상대편은 자신들의 귀중한 합법성을 존중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집권 초기 아옌데의 개혁은 온건한 것이었다. 수요를 촉진하기 위한 임금 인상, 토지 개혁, 경제 일부(오직 일부)의 국유화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조처들은 칠레 노동 대중에게는 진정한 진보를 뜻했다. 따라서 아옌데 정부는 집권 첫 날부터 국내외에서 적들과 부딪혔다. 미국 정부는 지원을 중단하고 부채 상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잠시 동안 반대파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럴 때 단호하고 대담한 지도부라면 재빠르게 움직여 노동 계급의 지지를 더 많이 얻고 우파들의 사기를 더 떨어뜨렸을 것이다. R H 토니(Tawney)가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양파는 껍질을 하나씩 벗겨서 먹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호랑이의 발톱을 하나씩 뽑을 수는 없다.” 토니는 호랑이 발톱을 하나씩 뽑으려 했다가는 물어뜯길 수도 있다고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개량주의
1971년 11월이 되자 반대파들은 재결집했다. 물자 부족 때문에 못살겠다고 주장하는 중간계급 여성 수백 명이 빈 냄비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 중 다수는 냄비 다루는 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하녀들을 데리고 나왔다. 이러한 시위들―영국의 〈시골 동맹〉을 생각나게 하는―은 상황을 더는 두고 보지 않겠다는 특권 계급들의 첫번째 경고였다.
부르주아지가 정말로 두려워했던 것은 부를 약간 재분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쯤은 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노동자들은 온건한 개혁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1971년에 파업 건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많은 노동자들은 국유화뿐 아니라 자기 작업장에서 권력을 실제로 행사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부르주아지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다음 공격은 1972년 가을에 찾아왔다. 트럭 소유주들이 파업을 조직했다. 그것은 사장들의 파업이었다. 그 파업의 목적은 칠레 국가 전체를 마비시키고 경제 혼란을 조성해 아옌데가 사임하거나 개혁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단기적으로 그 파업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경제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떠맡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권 계급들에게 더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판돈은 이제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아옌데는 노동자들의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여전히 양쪽의 중재자 노릇을 자처하면서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 1973년 봄에 칠레 노동자들 중 가장 잘 조직된 구리 광산 광부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정부는 광부들이 “고소득층”이라는 상투적 주장을 펼치며 광부들을 비난했다. 우파는 그 상황을 이용하려 애를 썼다. 모피 코트를 입은 여성들이 파업 노동자들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는 보도들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좌파들이 광부들을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우파의 위협이 커지자 노동자들은 코르돈[산업 벨트]이라는 독자 조직들을 결성해 공장들을 연결하고 저항을 조직했다. 페루인 트로츠키주의자 우고 블랑코는 칠레 수도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코르돈은 산티아고의 특정 거리들에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노동계급은 공장별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있고, 이들 노동조합은 다양한 산업 부문의 연맹들을 형성하고 있다.…혁명 전 상황에서 늘 그렇듯이, 대중은 자신들의 투쟁에 더 적합한 새로운 조직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옛 조직들을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장들이 경제를 뒤흔들고 물자 부족을 조장하려 하자, 노동자들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많은 투쟁을 벌여야 했다. 거대 기업 중 하나가 일부러 치약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블랑코에 따르면, 이에 대응해 노동자들은 “사장들의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많이 생각해 냈다.…노동자들은 손님이 북적대는 약국에 들어가 약 상자들을 열어서 그 안에 든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제지당하면, ‘비틀거리면서’ 치약들이 쏟아져 나오게 해 누구나 이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치약만이 아니었다. 군사 쿠데타의 위협에 관한 소문이 점점 더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규칙에 따른 경기만 고집하는 아옌데는 군대 내의 저항 세력이나 노동자들의 자기 방어 조직들을 전혀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헌법에 규정된 무장 세력 외에는 어떤 무장 세력도 있을 수 없다.…나는 다른 무장 세력이 나타나면 즉각 분쇄할 것이다.” 하고 엄포를 놓았다. 덕분에 아옌데가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군부는 아옌데 정부를 방어하겠다고 나선 좌파 조직들만 노린 일련의 무기 색출 작전을 벌일 수 있었다.
공포
아옌데는 군부와 협력할 의향이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군 장성들을 정부 고위직에 임명하는 개각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실행했다. 이것은 그들을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식욕만 더 돋궈 준 셈이었다.
9월 11일 군부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들은 아주 손쉽게 아옌데를 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일부 고립된 지역에서 영웅적 저항이 있었지만 반대 세력을 조직할 구심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좌파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아옌데의 의회주의를 추종했고 스스로 무장 해제된 상태였다.
이제 군부가 미쳐 날뛰었다. 미국 잡지 〈뉴스위크〉의 한 기자는 산티아고 시체 보관소에서 발견한 시체 더미를 이렇게 묘사했다. “시체들은 대부분 가까운 거리에서 턱 밑에 총을 맞아 죽은 사람들이었다. 일부는 기관총에 맞아 온 몸이 벌집이었다. … 그들은 모두 젊었고, 손이 거친 것을 보니 모두 노동계급 소속이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저지른 폭력도 약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살인은 한 세대에 걸친 노동계급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기층 지도부―작업장 대표자들, 노조 대의원들, 코르돈의 투사들―를 제거하려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십중팔구 3만 명이 죽었다. 전체 인구가 1천만 명도 안 되는 나라에서 3만 명이 죽은 것이다. 이에 비해 세계무역센터에서는 3천 명이 죽었다. 하나의 학살이 다른 학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2001년에 죽은 소방수, 청소부, 식당 종업원, 불법 이민자는 자기가 사는 나라의 외교 정책에 대한 발언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언론 보도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위선이 드러난다. 〈타임스〉(루퍼트 머독이 인수하기 전에는 그래도 괜찮은 신문이었다)는 “상황이 하도 심각해서 합리적인 군인이라면 개입하는 것이 자신의 헌법상 의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고 보도했다.
당연히 미국은 자기 ‘뒷마당’에서 사회주의가 이렇게 후퇴한 것을 환영했다. 미국은 칠레 장교들을 훈련시키는 데 1백만 달러를 썼고, 칠레 주재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은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점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칠레 국내의 세력 관계에 따라서만 개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베트남전 패배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직접 개입은 불가능했다.
주요 문제는 칠레 좌파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교훈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 글이 주장한 교훈으로, 좌파는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결성한 자주적 조직에 기초해 더 단호하고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고 의회 민주주의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럽 좌파들은 정반대의 교훈을 이끌어 냈다. 에릭 홉스봄은 “아옌데가 실패한 이유는…국민의 큰 부문들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갔어야 하는데 말이다.” 하고 주장했다. 칠레가 패배하자 유럽 전역에서는 우경화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칠레의 경험, 특히 코르돈에서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은 노동 대중이 스스로 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고무적인 사례였다.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