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2년:
전쟁과 저항 ― 부시의 테러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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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세계는 뉴욕 맨해튼의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쌍둥이 빌딩이 불타서 무너져 내리고 수천 명이 죽음을 당하는 참혹하게 경이로운 장면을 놀라움과 충격 속에서 바라보았다.
조지 W 부시는 그 대응으로 미국이 전쟁에 돌입할 것이며, “악에 맞선 선의 기념비적 투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토니 블레어에게 9·11은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올 7월 미국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현실에 역사적 선례가 이토록 쓸모 없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제국들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익숙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 ― 특히 영국 ― 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후자를 점령중이다.
다른 한편, 미국의 옛 식민지인 필리핀으로 미군이 되돌아오고,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영향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동남 아시아의 군도와 홍해 인근의 사막으로 뻗어나가는 등 미국의 군사 기지들과 원정군은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군사 작전과 함께 세계 비밀 경찰 기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주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이 주도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다른 많은 기관들이 연관돼 있으며 국내의 반테러법 및 대통령의 행정 명령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이 거대한 억압 기구의 희생자들은 재판도 없이 구금돼 조사와 고문을 받고 있다. 관타나모에 위치한 캠프 엑스레이(나중에 캠프 델타)가 이러한 일이 자행되고 있는 가장 유명한 장소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공군 기지에 있는 “수용 시설”도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정치적 선택
“테러와의 전쟁”이야말로 9·11에 대한 유일하게 정당한 대응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은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널리 유행하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자명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은 정반대일 수도 있다.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인 슬라보이 지젝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했다. “9월 11일에 미국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미국은 이 기회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지젝은 계속 말한다. “[9·11] 공격의 진정한 교훈은 이렇다. 이러한 사건이 미국에서 재발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이 다른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요컨대, 미국은 자신의 취약성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공격]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을 유쾌한 복수가 아니라 슬픈 임무로 여겨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마치 미국에 대한 분노의 원인이 미국의 지나친 권력이 아니라 권력의 결여였다는 듯이 세계 경찰로서 미국의 예외적 역할을 강력하게 재천명했다.”
다시 말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계기는 정치적 선택이었지, 9·11에 대한 자동적이고 불가피한 반응은 아니었다. 지젝은 이 선택을 미국 전체의 대응으로 보고 있지만, 지금 세계가 직면한 것은 부시 정부의 세계 제패 정책을 주도하는 공화당 우파의 핵심 인물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단계를 거쳐서 추진된 것이다. 먼저 부시는 2001년 9월 20일 상하 양원 합동 연설을 했고, 이어서 2002년 1월 29일 “악의 축” 발언을 했으며, 마침내 같은 해 6월 1일 웨스트 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부시 독트린을 선언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이 1년 전[2002년 9월]에 백악관이 발표한 〈국가 안보 전략〉이다. 그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미국은 위협으로 여기는 모든 국가를 일방적으로 공격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부시 독트린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9·11에 대한 대응이 아니란 점이다. 부시의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지난해 어떤 연설에서 이 점을 무심코 흘렸다. “9·11만큼 충격적인 지진은 국제 정치의 지층을 뒤틀 수 있다. 소련 붕괴 이후 국제 정치는 유동적인 상태였다. 지금은 그런 변화를 끝낼 수 있게 됐다. 정말이지 십중팔구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소련 붕괴와 9·11이 국제 정치의 중요한 변화를 예고한 것이라면, 지금 시기는 엄청나게 위험한 시기이자 동시에 굉장한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다. 진흙이 다시 마르기 전에 미국과 우리 우방과 동맹국들은 이 새로운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9·11은 그저 재앙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회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부시 정부가 원래 의도했던 일을 진행할 수 있는 핑계거리이기도 했다. 많은 논평가들은 그 프로젝트의 기원을 부통령 딕 체니가 아버지 부시의 국방장관이었던 1990년대 초에 작성한 〈국방 계획 지침〉과 일련의 신보수주의 지식인들 ― 그중 상당수가 아들 부시 정부에 참여하고 있다 ― 이 클린턴 정부 당시 기초한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경쟁국들
부시 정부의 이 과업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국방부 부장관 폴 월포위츠 같은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잠재적 ‘동급 경쟁국들’로부터 장기적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본다. 이 경쟁국들 중 일부는 유럽연합이나 일본 같은 오랜 경제적 라이벌들이다. 그리고 여전히 핵 초강대국이자 옛 적국인 러시아나 기록적 경제 성장 덕분에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된 중국 같은 새로운 경쟁국들도 있다. 미국은 다른 강대국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앞서 있는 자국의 군사력을 내세움으로써 미국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적 세력 관계를 굳힐 수 있다.
이라크 정복은 미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정복은 부시 팀이 추구하는 두 번째 목적에도 도움이 됐다. 중동에는 세계 석유 매장량의 3분의 2가 매장돼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미국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월포위츠와 부시 정부 내 그의 동료들은 중동의 기존 독재 정권들을 라틴 아메리카처럼 형식적으로 민주적인 자본주의적 과두제로 바꾸는 일련의 ‘민주 혁명’을 통해 미국의 지배 아래 중동 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셋째, 부시 정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일에 전임 정부들보다 훨씬 소극적이다. 미국이 다른 열강과 협력할 마음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유럽연합 내의 ‘옛 유럽’ ― 프랑스·독일· 벨기에 ― 과 영국·이탈리아·스페인의 우파 정부들이 주도하고 내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할 예정인 대부분의 중동부 유럽 국가들이 포함되는 친미 국가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했을 때 드러났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정학적 계획이다. 지도적 신보주수의자들이 아직 끝나지 않은 장기간의 전쟁에 돌입했다고 떠들어 대는 것도 당연하다. 전 CIA 국장 제임스 울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제4차세계대전(냉전을 제3차세계대전으로 여기는 듯하다)이라고 부르면서 이 전쟁이 수십 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부시의 핵심적 정치 보좌관 칼 로브는 이라크 전쟁을 그저 한번의 전투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 전쟁은 지금까지 어떻게 진행돼 왔는가? 부시 정부가 내세운 주된 성공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거둔 재빠른 군사적 승리이다. 그러나 사실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 강국이 비틀거리는 군벌의 군대나 13년 간의 경제 봉쇄로 쇠약해진 중간 규모의 아랍 국가를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뻔한 군사적 승리의 결과는 훨씬 더 모호하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두 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하나는 공군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CIA 요원들이 군벌들을 회유하기 위해 뿌린 돈이었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대부분 군벌들의 통치 시대로 되돌아갔고, 허수아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카불에서 권력의 실체가 아니라 상징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이 구도는 아프가니스탄의 고통받는 민중에게는 더 많은 고통을 의미하지만, 미국 국방부의 목적에는 잘 들어맞는다. 아프가니스탄의 오랜 전통에 따라 산으로 잠적한 알 카에다와 탈레반 전사들을 노리는 미국 엘리트 부대에게 바그람은 편리한 기지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나머지 지역을 안정시킨다는 가망없는 임무는 이제 막 국제안보지원군의 책임을 이양받은 나토에게 맡겨라.
재앙
그러나 이 냉소적인 공식은 이라크에는 적용될 수 없다. 사담 후세인을 전복시키면서 미군은 아랍 세계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또, 미국은 세계 2위의 석유 매장국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됐다. 따라서 일이 꼬이더라도 부시는 클린턴이 1993∼94년 소말리아에서 그랬듯이 해당 나라를 작살낸 채 간단히 군대를 뺄 수는 없다. 그러기에 이라크는 너무나 중요하다. ‘민주 혁명’은 바로 여기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상황들은 ‘민주 혁명’이 실패할 것임을 보여 준다. 국내에 기반이 있는 이라크 지도자들 중 연합군 임시정부와 ‘과도통치위원회’에 참여할 만큼 간 큰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 중요한 점으로, 현재 미군과 영국군은 끊임없이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저항은 주민 대부분이 수니파 무슬림인 이라크 중부에 집중돼 왔지만, 주민 다수가 시아파인 남부에서도 산발적으로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가장 중요하게는 6월에 영국 헌병 6명이 살해당한 사건).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 아말과 헤즈볼라의 시아파 게릴라들의 공격 때문에 처음에는 미군이, 그리고 나중에는 이스라엘군이 철수해야 했던 레바논의 선례가 지금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워싱턴에 있는 전략연구센터의 앤서니 코즈먼 교수는 최근에 “만약 미국이 실수를 범한다면, 단지 중동의 평화가 깨질 뿐 아니라 제3차 걸프전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고 경계했다.
이러한 재앙적 시나리오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많은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에 묶여 있어야 할 것이다. 지난 2월 전역을 앞둔 미군 장성 에릭 신세키는 이라크를 점령하는 데 수십만 명의 병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이라크 정복을 준비하고 있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이 주장을 일축하고는 신세키를 지지했던 육군 담당 차관 토마스 화이트를 해임했다.
입증
그러나 바그다드 함락 이후의 사건은 신세키가 옳았음을 입증했다. 6월 말에 〈파이낸셜 타임스〉는 소말리아·아이티·보스니아·코소보·아프가니스탄에 미국 특사로 파견됐던 제임스 도빈스와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도빈스 씨는 현재 약 17만5천 명인 [이라크] 주둔 [미]군 규모는 불충분하며 더 현실적인 규모는 30만 명이라고 추정했다. 만약 미국 혼자서 이 군사력 전체를 감당해야 한다면 이것은 미국의 군사적 자원에 재앙이 될 것이다. 또, 병사들이 순환 복무한다면, 거의 1백만 명의 병사들 ― 사실상 미군 전체 ― 을 의미한다고 도빈스씨는 지적했다. 국방부 관리들은 이 수치를 부정했지만, 이라크 점령이 미국의 재정에 부담이 될 것이란 점은 인정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해군과 공군, 그리고 주로 공중 지원과 첨단 무기 체계에 의존하는 비교적 소규모의 직업적 육군을 이용하는 압도적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육군이 이라크에 발이 묶인다면 부시 정부의 세계 제패 전략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충돌은 열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한 미국 고위 관리는 최근에 〈파이낸셜 타임스〉에 이것은 “[이라크 전쟁보다] 더 전통적인 재래식 전쟁이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막은 애들 장난으로 여겨질 만큼 복잡한 지형에서 펼쳐지는 피비린내 나는 지옥이 될 수도 있다.” 하고 말했다.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그러한 전쟁을 일으킨다면, 미국은 이라크 상황이 계속 악화될 경우 결코 동원할 수 없는 규모의 지상군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의 ‘민주적 제국주의자들’은 종종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제국주의를 모범으로 인용하곤 한다. 어쨌든, 19세기 영국 자본주의는 역사가들이 ‘자유무역 제국주의’라고 부른 것에 더해서 거대한 해군과 소규모 자원병 군대에 의존해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전 세계에 걸친 제국을 유지했다. 최근에 신보수주의자 중 한 명인 막스 부트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처한 상황을 보았을 때 “우리는 영국이 인도 등에서 유지했던 식민성(省)을 본 딴 기구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빨리. … 영국의 선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식민성은 필요하다면 지원군을 요청할 수 있는 엘리트 민간 기구가 돼야 한다.” 하고 말했다.
영국의 인도 제국의 한 가지 기능은 단지 인도 대륙을 억압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국의 다른 식민지 전쟁 ― 예를 들어 19세기 말 수단과 남아프리카 ― 에서 대신 싸우는 군대를 제공하는(그리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1만 7천 명 규모의 육군 1개 사단을 이라크에 파견하도록 인도 정부를 설득하려던 노력이 실패한 것을 보면, 미국의 의도에는 일정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다.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부시 정부와 가까워지기 위해 기꺼이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하겠지만, 결국 군사적 부담은 주로 미국과 그 충실한 동맹국 영국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최근에 영국 국방장관 제프 훈은 미국의 전쟁을 거들어 싸우는 것이 영국의 공식 군사 독트린이라고 선언했다.)
부시 정부가 이라크에서 처한 어려움은 초강대국 미국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미국은 심지어 군사 분야에서도 전능하지 않다. 이것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경제는 월스트리트 거품 경기가 꺼지면서 발생한 불황으로부터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무역 등의 쟁점에서 부시 정부는 이라크를 둘러싸고 불쾌한 경험을 겪은 이후 타협을 회피하는 퉁명스러운 유럽연합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 제국주의가 직면한 한계는 물질적일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기도 하다. “테러와의 전쟁”은 지젝이 말한 미국의 ‘지나친 권력’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것은 엄청난 정당성의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지금 인도를 지배하는 힌두 국수주의 무리조차도 부시 정부가 중동에서 추진하는 식민지 프로젝트에 긴밀하게 참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은 세계적 반전 운동이 9·11 이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에 바치는 일종의 찬사다. 미국의 힘이 이토록 널리 도전받은 적은 없었다. 그 결과 부시 정부의 운신의 폭이 크게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허튼 조사위원회[토니 블레어의 대량살상무기 관련 거짓말을 조사하는 영국의 기구]가 보여 주듯이 그 가장 가까운 동맹인 토니 블레어의 정치 생명이 끝장나기 일보직전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맞선 투쟁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성취한 것은 우리가 계속 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