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사이드 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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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사이드 추도사
진실과 정의, 팔레스타인을 옹호한 투사
정의를 위해 싸우는 전 세계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탁월한 대변자 한 명을 잃었다.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이자 비평가인 에드워드 W 사이드가 지난 9월 25일 사망했다.
사이드는 여러 면에서 있을 성싶지 않은 급진주의자였다. 그는 1935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보수적인 영국계 아랍인 가문으로, 사이드의 이름[에드워드]도 영국 황태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1999년에 발표된 감동적인 회고록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살림 출판사 간행. 영어 원제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놓인”이다.]에서 사이드는 유소년기의 자신을 팔레스타인·이집트·레바논을 옮겨다니며 밀실공포증에 시달린 특권층소년으로 묘사했다.
1948년에 수립된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서예루살렘에 있던 사이드의 고향집도 이 때 사라져 버렸다.
사이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고향이라고 느낀 도시의 시가지를 폴란드인·독일인·미국인 이민자들이 차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그들은 이 도시를 장악해 자기네 주권의 독특한 상징으로 만들고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 공간은 완전히 없애 버렸다. 그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 공간은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 동부로 국한된 것처럼 보인다.”
밀실 공포증
그러나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겪은 최악의 참상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카이로에서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아버지의 재산 덕분이었다.
사이드는 미국의 프린스턴과 하버드 대학교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 뒤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얻어 40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극단적인 시온주의 파시스트들부터 세속적인 반시온주의자들까지 온갖 종류의 유대인들이 들끓던 이 거대 도시에서 생활한 것은 사이드가 전통적인 인문학자에서 위대한 반제국주의 지식인으로 변모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기성 정계와 언론계에 맞서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옹호하는 행위는 사이드의 용기를 시험대에 올렸음에 틀림없다.
1970년대 이래로 그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처음에 그는 야세르 아라파트를 지지하는 온건파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는 두 국가 해결책을 옹호했다.
사이드의 진보적 급진주의가 최초로 드러난 것은 그의 이론적 저작에서였다.
1978년에 발표된 그의 가장 유명한 책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 출판사]은, 근대 서구 문화와 학문이 동양을 수동적이고 세속적이며 불합리한 ‘타자’로 묘사하며 정복과 지배를 합리화한 방식을 학구적이면서도 통렬하게 비판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영어권 학계에서 ‘탈식민주의’ 연구를 유행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사이드는 세계 나머지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무시한 ‘유럽 중심주의’ 사상가들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도 그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명백한 오류라는 사실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자 아이자즈 아마드 같은 비평가들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사이드는,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다는 사상을 부인한 포스트모더니즘에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문화와 제국주의》[창 출판사] 같은 후기(1993) 저작에서 표현된 전망은 급진적 휴머니즘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세계 모든 곳의 피억압·피착취자들과 일체감을 느꼈고 그들의 해방 투쟁을 옹호했다.
1991년에 사이드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는 결국 백혈병의 합병증으로 죽었다. 마지막 12년 동안 그의 목소리는 더욱더 분노로 가득 찼고 열렬해졌다.
그는 1993년의 오슬로 협정에 따른 팔레스타인 평화 과정에 반대했다. 그는 그 협상이 이스라엘의 지배를 영속화하고,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투스탄[bantustan, 일종의 분리 고립 지대. 반투족을 격리한 것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처럼 이스라엘의 폭압 통치를 받는 조그만 영토만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남겨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2∼3년 전에 그가 런던에서 연설했던 게 생각난다. 호리호리하지만 기품 있는 한 사람이 압도 다수가 아랍인인 수많은 청중에게 큼직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도를 보여 주며 평화 협상이 사기극임을 폭로하고 있었다.
말년에 사이드는 공격 목표를 늘렸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배 도당뿐 아니라 아라파트와 부패하고 소심한 아랍 정권들도 비난했다. 서방이 계속 중동을 지배할 수 있도록 그들이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테러와의 전쟁”을 처음부터 반대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그는 시온주의자들의 엄청난 비방에 시달렸고, 한때 좌파 저널리스트였다가 이제는 부시 지지자로 변모한 자기 친구 크리스터퍼 히친스의 배신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히친스는 《오리엔탈리즘》 개정판이 미국이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수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난한 지 몇 주도 안 돼 뻔뻔스럽게도 〈업서버〉(10월 5일치)에 추도사를 기고했다.
사이드는 서로 다른 투쟁 사이의 연관 관계도 인식하게 됐다.
그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민중 봉기]를 반자본주의 운동과 결부시키며 2000년 12월에 이렇게 썼다. “그것[인티파다]은, 시애틀과 프라하에서 드러난 (경제적·정치적) 탈냉전 질서에 대한 전반적 불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이다.”
그의 친구인 이집트 작가 아흐다프 수에이프는 〈가디언〉에서 그를 추모하며 최근 논쟁에서 그가 한 말을 인용했다. “우리 민중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왜 아무도 더는 진실과 정의를 말하지 않습니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진실과 정의를 말하는 것은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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