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혁명 현지 보도:
독재자가 도망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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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거주하는 튀니지 출신 사회주의자 모하메드는 벤 알리를 대통령직에서 몰아낸 대중투쟁에 참가하려고 지난주 튀니지로 갔다. 아래는 모하메드가 〈소셜리스트 워커〉에 말한 경험담이다.
저는 금요일(1월 14일) 낮 12시 반에 튀니지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부르커바 거리의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6만 5천 명이 참가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튀니지에서는 참가자가 수백 명이 넘는 시위를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이날 시위는 이전 시위에서 경찰의 공격으로 머리에 총을 맞아 뇌수가 터지고 두개골이 박살난 사람의 모습을 담은 충격적인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된 직후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충격적 사실을 접하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제 저들이 두려워할 차례였습니다.
우리는 내무부 청사 앞으로 갔습니다. 시위대는 매우 평화로웠습니다.
주된 구호는 ‘떠나라, 떠나라’였고 ‘벤 알리에게 과녁을 안겨 줘라’ 하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4시가 되자 경찰이 갑자기 공격했습니다. 그때 전날 살해된 시위 참가자의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것을 빌미로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최루가스를 뿌렸고 저는 총성을 들었습니다. “이건 최루탄이 아니라 실탄이다” 하고 사람들은 소리쳤습니다.
두 시간 뒤에도 사람들은 같은 곳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제 매형은 그때 근처 지붕에 고립돼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쓰러진다. 경찰이 사람들을 때리고 있다.”
시위는 자생적으로 조직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 가까이 벌어진 항쟁에서 노조가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원래 튀니지 노동총동맹(UGTT)은 오랫동안 정권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번에 신속하게 편을 바꿨습니다. 좀더 급진적으로 변했습니다.
UGTT 는 이번 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습니다. 나라 한복판에서 운동을 시작했고 내무부 앞에서 시위를 벌일 것을 호소했습니다. UGTT는 이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당시 벤 알리의 처가 친척인 트라불시 가문이 금요일 오후 2시에 해외로 도주하려 시도했지만 비행기 승무원들이 비행을 거부해 실패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트라불시 가문의 핵심 인물인 에마드 트라불시는 날카로운 것에 아홉 군데를 찔려 병원에서 숨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이 소유한 집들은 모두 불탔습니다. 거의 모든 쇼핑센터와 경찰서도 불탔습니다.
튀니지의 다른 곳들처럼 우리는 지역위원회를 만들어 대통령 보안군의 잔존물인 무장 민병대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민병대는 도시를 활보하면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구를 이용해 차단막을 만들어 도로를 봉쇄했습니다. 또, 인근 지역을 정찰하고 통행금지 시간 이후 이동하는 모든 차량을 의심했습니다.
튀니지 공중파 방송들은 보도 내용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치열한 논쟁이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은 부패를 척결하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 공개적으로 자기 의견을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 55년 동안 대통령 단 두 명이 나라를 통치했는데, 갑자기 24시간 동안 대통령이 두 번 바뀌는 상황이 됐습니다!
총리 가누치가 “대통령의 일시적 직무 불이행”을 근거로 권력을 잡자 남부에서는 더 많은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튀니지는 계엄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옛 악당들이 권좌에 남아 있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거리로 나서고 있습니다.
정부는 공산주의자나 이슬람주의자 때문에 사람들이 시위를 벌인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도 이슬람주의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대중 운동입니다. 튀니지 정부는 ‘정치’를 더러운 단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자신은 그저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정부는 조금씩 조금씩 궁지로 몰렸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모든 타협안은 때늦은 것이었습니다.
만약 정부가 미리 타협안을 내놓았다면 그들은 사태 확산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민중이 항상 한발 더 앞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