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예술가를 굶겨 죽이는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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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포츠머스 대학 교수인 존 몰리뉴는 예술은 소외에서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분명 예술은 자기 결정적 활동이다. 예술이 자기 내적인 가치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구성돼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전히 그럴 수 있는지는 논외로 두고서 말이다.
한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 죽었다. 2010년 2월, GDP 2만 달러가 넘는 대한민국의 수도권 한 구석에서. 이미 몇 달째 월세가 밀린 상태였다. 그녀의 마지막 ‘글’은 옆집에 붙인 쪽지 하나였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옆집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그녀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돈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영화판에서도 그녀는 실력을 인정받았다. 시나리오를 계약했지만 한 번도 영화화는 되지 못했다. 신인 작가들은 제작에 들어가야만 계약금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힌 역사의 비밀은 단 한 가지다. 사람은 먹고, 자고, 살 수 있을 때 그 다음의 것들을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팔리는 기준’에 복속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좋은 예술을 보여 주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
소설가 김종광은 한 달 수입이 1백만 원 이하가 되어서는 자본에 굴복하게 된다며 등단 후에도 학원 강사를 계속 했던 바가 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절대적인 시간을 빼앗기면 예술활동에 투자할 시간도 빼앗긴다. 적어도 예술가들의 마지막 말이 ‘남는 밥 좀 주세요’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울시는 서울 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재단은 경쟁을 통해 선별적으로 지원금을 지급하는 한편, 재단의 지원금 대부분이 ‘예술 축제’, ‘시민 축제’, ‘기획 프로젝트’ 라는 명목으로 전시가 가능한 프로젝트로 빠져 나간다. 실질적으로 가난한 창작자들이 편안하게 창작을 하는 데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런가하면 정부의 민간단체지원금은 4대강 사업, G20 등을 홍보한 단체들에 집중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나는 대학원에서 소설을 전공하고 있다. 내가 눈물을 그렁이며 이 이야기를 전하자,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아마도 그게 우리의 미래일 거라고. 누군가가 굶어죽고 난 다음에도 온 나라의 음식점들에선 밥이 달달 끓을 것이고, 편의점에선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이 버려질 것이다. 그 음식들을 누가 먹을 수 있을까.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는 우리 모두의 미래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