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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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7년 ‘맑스코뮤날레’에서 ‘다함께’ 최일붕 운영위원이 발표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주간지 〈맞불〉에 게재했던 글이다. 21세기 혁명의 의미와 혁명가들의 과제를 다룬 이 글은 최근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적 격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21세기 혁명”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먼저 혁명의 의미부터 살펴봐야겠다. 왜냐하면 옛 소련 몰락 이후 그 사건을 “사회주의의 실패”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여전히 대세인 데다 최근 신보수주의자들조차 “민주주의 혁명” ― 미국의 군사력을 이용해 강제로 ‘정권교체’와 신자유주의를 실시하기 ― 운운하는 지경에 이르자 좌파의 사상적 혼란이 한층 심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안세계화운동의 선두 주자인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에 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자 존 홀러웨이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적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매우 절박하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홀러웨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갈무리, 327쪽)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반신자유주의 운동가 중 하나인 수전 조지도 유럽사회포럼에서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게 21세기 초에 뭘 뜻하는지 더는 모르겠다고 고백해야겠다”고 했다.
혁명이 뭘 뜻하는지 이해하려면 일단 보안경찰과 공안검사 등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면서 단죄하는 ‘혁명’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혁명’은 모반(謀叛), 즉 한 줌밖에 안 되는 전사·게릴라·군인 들이 비밀리에 조직하는 무력 정변일 뿐이다. 극우 논객 조갑제는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부르면서 뿌듯해 한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에 의한 것만이 진정한 혁명이다. 이런 혁명 개념만이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따른 용어법 ― 가령 ‘혁명적 사회주의’, ‘혁명적 정당’, ‘혁명적 전략’ 등 ― 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이론적 논의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다.
트로츠키의 경구(警句)를 빌어 말하면, 혁명은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영역으로 강제로 들어가는 것”이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풀무질, 상권 14쪽).
5·16 따위는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 그람시 특유의 용어인 “수동적 혁명”에 속한다. “수동적 혁명”은 극소수 근대화 엘리트 집단의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전통적 사회관계들이 철저하게 변모하는 것을 말한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통일(리소르지멘토), 19세기 후반 독일 비스마르크의 이른바 “국가사회주의”적 개혁, 일본의 메이지 유신, 1928년 이후 스탈린의 소위 “제2혁명”, 파시즘, 1989/91년 옛 동구권 붕괴 후 들어선 정권들에 의한 개혁 등은 물론이거니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체가 “수동적 혁명”의 사례들이다.
사회 혁명
혁명이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볼 때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식 혁명”은 혁명인가? 대답은 ‘예스’인 동시에 ‘노’라 할 수 있다. 위로부터의 차베스 주도 자체만 보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하지만 그 주도에 대한 대중의 응답으로서 주민자치위원회 건설 등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보면 그것은 혁명이다.
혁명이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수반한다는 점만으로는 혁명에 대한 정의로 충분하지 않다. 그 대중 행동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얘기가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마르크스의 ‘정치 혁명’/‘사회 혁명’ 개념이 유용하다.
마르크스는 국가 권력의 급속하고 강제적인 변혁만 일어나는 경우는 단순한 정치 혁명이라고 했고, 정치 혁명이 더 넓은 사회 변혁 과정을 결정적으로 가속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는 사회 혁명이라고 했다.
사회 혁명은 정치 혁명을 포함한다. 네그리와 홀러웨이 등 마르크스주의자를 표방하는 자율주의자들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며 정치 혁명을 배제한 사회 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 혁명 개념과 전혀 관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베버 학파의 역사사회학자 테다 스코치폴이 사회 혁명에 대해 정의한 바, 즉 “사회 구조와 정치 구조의 근본적 변동이 상호보완적으로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사회 혁명 개념과 부합한다(스코치폴, 《국가와 사회혁명》, 까치, 18쪽).
1640년 영국 혁명, 1776년 미국 혁명,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1949년 중국 혁명은 사회 혁명이었다. 반면, 1960년 한국의 4·19와 근래 몇 년 새 라틴아메리카의 볼리비아 등지에서 일어난 반란은 분명히 혁명이긴 했으나, 사회 혁명은 아니었고 단순한 정치 혁명이었다. 물론 볼리비아의 경우 몇 년 안에 사회 혁명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따라 혁명을 정의하면,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으로 근본적 정치·사회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은 언제 일어나는가?
21세기에도 이런 의미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순전한’ 정치 혁명은 지난 6∼7년 동안에만도 벌써 몇 차례나 일어났다(2000년 에콰도르, 2000년 세르비아, 2001년 아르헨티나, 2005년 볼리비아 등). 앞으로도 수없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경제의 회복은 짧아지고 부진은 더 길어지는 식으로 경제 위기가 질질 끄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지배자들은 경쟁 격화에 대처하기 위해 억압과 비민주성을 강화하고, 전쟁이 계속 빈발하고, 지구 온난화로 말미암은 재난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피지배자들이 삶을 점점 더 참기 힘든 것으로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대중 반란이 반드시 일어나지는 않는다. 고통은 민중이 투쟁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고, 서로 분열시킬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배계급도 경제와 정치의 위기 상황에선 쉽사리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뒤죽박죽과 당혹과 잦은 실수를 하게 된다. 위기가 심각하면 그들은 일이 잘못된 책임을 서로 떠넘기며 비난하고, 경쟁자를 희생시켜 곤경을 벗어나려 한다. 이런 아귀다툼이 격화하면 그들의 선전 기구와 억압 기구도 내홍에 휘말려, 언론 매체와 검찰 같은 기구들이 지배자들 사이의 상호 공격에 동원되곤 한다. 심지어 일부 지배자들은 대중을 동원해 라이벌을 제거하려는 모험까지 감수한다.
지배자들 간의 이런 쟁투와 내분은 피지배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고 때로는 거대한 저항을 고무하기도 한다. 특히 전쟁은 종종 혁명을 일으키곤 한다. 가령 러일전쟁의 여파 속에서 러시아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1년여 뒤 독일·헝가리·오토만제국 등지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중국, 남한 등지에서 혁명이나 준혁명이 일어났다.
1948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랍이 패배한 여파로 4년 뒤 이집트 왕정이 타도되고 나세르 정권이 들어설 수 있었다. 1956년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한 전쟁의 여파로 1958년 이라크에서 혁명이 일어나 친영 왕정을 타도했다. 1962년 이래 포르투갈의 파시스트 정부는 아프리카 식민지 앙골라·모잠비크·기니비소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1974∼75년 포르투갈 자체 내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 모든 경우에 전쟁은 의도치 않게 혁명의 산파 구실을 했다. 물론 전쟁 초기엔 애국주의가 득세하기 십상이다.(1914년 독일에서 애국주의 광풍을 만난 룩셈부르크는 잠시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엔 분위기가 달라지곤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도 만일 대만을 둘러싸고 미·중·일이 격돌한다면 한반도는 전쟁터가 될 뿐 아니라 혁명의 진원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훨씬 더 있을 법한 상황은 중동에서 먼저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 기층민들이 더는 지금처럼 못 살겠다며 민중 항쟁을 일으키고 사회 상층이 기존 지배 방식대로 지배할 수 없다고 느끼는 상황이 도래하면 사람들은 사회의 미래를 놓고 대안을, 해결책을 (혁명이나 파시즘 같은 극단적인 것을 포함해) 모색하게 된다.
20세기 전반부의 자본주의는 대규모 전쟁과 경제 위기로 점철되면서 이러한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 냈다. 21세기 초의 자본주의도 세계화가 빚어내는 혼돈으로써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년 새 라틴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등지에서 일어난 혁명들은 앞으로 수십년 새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민중 권력과 혁명 정당
거침없이 세계화하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 하에서 세계의 어디에선가 정치 혁명이 일어나는 건 거의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 혁명이 사회 혁명 상황으로 발전하느냐는 결코 필연이 아니다. 또, 사회 혁명이 승리하느냐도 필연이 아니다.
단순한 정치 혁명이 사회 혁명 상황, 즉 온전한 의미에서 혁명적 상황으로 발전하려면 아래로부터 민중 권력이 등장해야 한다. 파리 꼬뮌 때의 꼬뮌, 러시아 혁명 때의 소비에트 등이 그것이다.
진정한 민중 권력은 아래로부터 건설되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대중 조직이다.
민중 권력 기관은 생산은 물론이거니와 물·전기·가스 등 필수 서비스와 식료품, 의약품, 교통수단 등도 관리해야 한다. 언론 매체도 접수해야 한다.
꼬뮌이나 소비에트의 대표는 선출돼야 하고, 그 대표는 노동자 평균 임금만을 받아야 하고, 직책 수행에 문제가 있으면 즉시 소환이 가능해야 한다.
이런 기층대중 권력 기관은 1871년 파리 꼬뮌 때나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1918∼19년 독일에서처럼 자생적으로 등장할 수도 있지만,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처럼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2005년 6월 볼리비아 봉기에서도 이렇다 할 정도로는 등장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도 현재로선 그다지 다르지 않다.
조직된 혁명가들의 개입 없이 정치 혁명이 사회 혁명 상황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발전이 확실해지려면 그들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이런 기층 민중 권력과 기존 국가 권력은 한동안 병존한다. 이를 두고 “이중(이원) 권력”이라 한다.
이원 권력 상황은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 조만간 한쪽이 살려면 한쪽이 죽어야 하는 운명의 시간이 도래하게 마련이다. 이 때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고전적 문제가 더욱 첨예해진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자율주의식 문제 회피는 운동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이 때 혁명적 정당의 구실이 사활적이다. 이것이 앞에서 필자가 사회 혁명의 성공도 필연이 아니라고 했던 이유다.
노동계급의 중요성
그런데, 민중 가운데 과연 어느 부분이 민중 권력 창출을 주도할 실제 힘을 가졌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사실, 모든 혁명은 민중 혁명이다. 따라서, 민중 혁명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중 가운데 어느 계급이 다른 천대받는 사회집단들에 “헤게모니”(다른 사회집단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특별히 일컫는 용어)를 행사할 능력이 있느냐에 대해 얘기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계급이다. 어떤 심각한 위기 속에서든 지배계급은 민중에게서 가장 증오받는 인물 몇몇을 제거하고 몇몇 개혁을 실행하는 등의 양보 조처로 시간을 벌면서 구체제의 골간을 유지하려 애쓴다. 특히 공장과 사무실, 은행, 광산, 토지 등에 대한 지배권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경찰과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려 애쓴다. 지배계급이 절대 놓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는 이 두 가지 수단, 즉 생산 수단과 탄압 수단의 내부에서 상향식으로 대중 조직을 건설할 수 있는 사회세력은 노동계급과 보통의 군인들이다.
21세기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노동계급은 단지 대공장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분할매각, 외주, 아웃소싱, 특수고용직, 임시·비상용직의 시대에 노동계급은 소규모 작업장·사무실의 종업원 형태로도 광범하게 존재한다.
집단적 계급
대공장 노동자들은 혁명 상황에서 소비에트를 창출하겠지만(만약 한다면), 소규모 작업장과 사무실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그 지역사회의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꼬뮌을 창출할 것 같다(만약 한다면).
대공장 노동자든 다른 종류의 노동자든, 특정 노동자 집단이 수행하는 노동의 종류와 관계 없이 모든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착취와 천대가 없는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 건설의 주역이 되기에 적합한 생활조건 속에 존재한다. 노동계급은 집단적 계급인 것이다. 물론 개별 노동자들은 다른 사회집단의 개별 성원들보다 특별히 덜 이기적이거나 덜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기 생계를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또한, 노동자들은 조건을 개선하거나 지키려면 집단으로 행동하고 조직해야 한다. 수면 시간이 아닌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노동자들은 직장(출퇴근 시간 포함)에서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보낸다. 출신은 다양해도 거의 다 비슷한 조건 속에서 일하고 살아간다. 특히 사용자의 착취 강화 기도에 맞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등 단체로 조직하고 행동해야 한다.
혁명 상황에서는 수구적 장교들에 맞설 수 있는 사병들과 하급 지휘관들의 민주적 대중 조직이 필수적이다. 물론 이 문제에서도 군대 내에서 은밀히 활동할 혁명가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물론 이것은 당면한 한국 상황에선 추구할 과제가 아니다.
20세기는 물론 21세기 초의 지난 몇 년 새만도 우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불안정이 빈발하는 가운데 민중 권력이 돌연 현실적 가능성이 되는 것을 힐끗 목격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재연될 것이다. 교훈을 얻어야 한다. 다음 번 반란 때는 민중이 단지 역사의 문턱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훌쩍 문턱을 넘도록 의식 있는 소수가 지금부터 꾸준히 조직해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