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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훌륭한 역사학도이기도 해야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소위 말하는 동북아 3국의 “역사전쟁” 여파가 정치 상황과 맞물려 번지면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됐다.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가 역사를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꾼 것에 대한 반발이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대중적인 관심은 역사이론 발전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는 듯하다. 최근 대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주로 민족주의적 정서를 부추기는 매스컴의 선동에 영향을 받은 측면이 크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궁핍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2008년의 경제 위기와 촛불항쟁을 거쳐 급진화된 청년들도 과거보다는 현재, 현실을 묻는다. 열정에 찬 청년들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논하기보다 대안적인 미래로 향하는 직행열차를 타고 싶어 한다.

현실이 이런데,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역사를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역사는 이론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그냥 유물론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유물론이며, 동시에 ‘역사적인’ 유물론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뛰어난 현실분석가여야 하고, 동시에 훌륭한 역사학도여야 한다.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탁월하고 혁명적인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훌륭한 역사학자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다음의 세 개념을 살펴보며 얘기해 보겠다.

1. 유물론 :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반영이다.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려면 인간이 존재해야 하며, 인간이 존재하려면 그의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경제활동은 인간 역사의 근본이 된다. 인간의 사회경제적 토대에 의해 정치·사상·법 질서·이데올로기 등의 상부구조가 규정되며, 그 상부구조는 다시금 토대를 강화하고 정당화한다.

2. 변증법 : 인식 대상을 파악할 때 하나의 전체 속에서 파악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전제 하에 사물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모순인데, 이 모순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모순의 누적에 의한 사회적 양질전환을 이끌어내는 주체가 누구인지 주목해야 하고,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3. 역사 : 변증법과 역사는 긴밀한 관계다. 이를 밝혀내려고 마르크스가 자신의 유물론을 발전시킨 과정을 보자.

마르크스가 유물론자로서 관념론자들을 비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당대의 유물론(기계론적,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비판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역사적 유물론’으로 자리잡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다.

마르크스는 당대 유물론의 대부격인 포이에르바흐에 대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하고 혹독히 비판했다. 그리고 그의 유물론을 “관조적이고 비일관적인 유물론”이라고 규정했다.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적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정지된 것으로 본다. 관념이냐 물질이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 인식의 기본 틀은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은 관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식 인식론의 약점을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이를테면 맨체스터에서 포이에르바흐는 단지 공장들과 기계만을 볼 뿐, 1백 년 전에 그곳에는 물레와 베틀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며, 로마의 평원에서 그는 … 로마 자본가들의 포도원과 별장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다.”(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번역 박재희, 《독일 이데올로기I》)

이처럼 포이에르바흐 유물론의 약점은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이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대상(혹은 현실)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이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지금 서 있게 된 맥락을 생각해야 한다. 맥락! 그 맥락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 ‘역사적 유물론’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켜 온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부단한 실천이다. 이 “실천”을 빼놓고 마르크스주의를 설파한다는 것은 앙꼬를 뺀 찐빵을 찜통에서 쪄놓고 “찐빵 먹어라!” 하고 외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마르크스 유물론에서는 인식 주체와 대상을 결코 분리된 지평 속에서 다루지 않는다. 인간 실천의 이런 궤적들, 그것이 바로 역사이며 그 실천의 궤적들에 정통해야 현실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결코 세계를 바라볼 때 그 현상에 급급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그것이 변해 왔음을, 그리고 계속해서 변해 갈 것임을 언제나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 과정을 추동해 왔던 것은 그 내부의 모순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

2007~2008년 경제 위기가 터졌을 때 사람들은 “잘 나가던 경제가 어느 날 갑자기 붕괴했다”며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십년에 걸친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조망하며 이 경제 위기가 누적된 자본주의 모순의 결과임을 입증하려 노력했다. 만일 그들이 세계 경제사에 정통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경제 위기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적이기 위해서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역사적’이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