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레프트21〉 51호 온라인 독자편지 '굳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한 의견입니다.
‘사회주의’라는 용어의 고수가 유럽식 사민주의나 소련의 스탈린주의 같은 ‘실패한 길’을 연상시키면서 진지한 청중과의 접촉면을 줄일 수 있다는 천경록 씨의 문제의식에 일정 부분 공감한다. 비록 용어가 핵심은 아닐지라도, 가진 게 별로 없는 우리로서는 선전·선동의 무기인 말과 글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경록 씨가 예로 든 표현들(민주적 계획 경제, 노동자 민주주의, 경제 민주화, 무계급 무국가 사회 등)은 우리의 정치를 축약하는 표현으로서는 다소 일면적이거나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적 계획 경제’와 ‘노동자 민주주의’는 새로운 세상의 기본 조건임에 틀림없지만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경제 민주화’는 온건 PD의 문제의식에 기울어 있으며, ‘무계급 무국가 사회’는 아나키즘과의 구분선이 명확하지 않다.
내 생각에는 ‘마르크스주의’나 ‘혁명적 사회주의’가 청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우리의 정치도 충분히 포괄하는 표현인 것 같다. 실제로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당시 유행하던 온갖 ‘사회주의’ 조류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자신의 사상을 명확히 했다. 우리의 연간 최대 행사의 이름인 ‘맑시즘(Marxism)’은 바로 그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명시적인 선언이 아닌가.
현 시기 대중, 특히 급진화하는 청년들은 스탈린주의의 굴레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동시에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충분히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사회주의’를 고집할 필요는 없으나 또 굳이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둘 필요도 없다. 물론 보편개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현 시기 대중들이 구체적인 삶에서 맞닥뜨리는 갖가지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선전·선동·실천으로 엮여질 때에야 빛이 난다는 것을 천경록 씨 역시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