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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동계급의 힘을 보여 준 위스콘신 투쟁

미국 노동자 수십만 명은 위스콘신 전투 덕분에 자기 힘을 다시 발견하게 됐다. 위스콘신 전투는 지난 몇십 년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투쟁들 중 가장 인상적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학생, 고참 반전 활동가, 연금 생활자, 지역 활동가, 심지어 일부 경찰의 지지를 받아 매디슨 시를 마비시켰다.

그들은 만약 우익이 공격을 밀어붙인다면 노동자들도 반격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우익에게 전달했다.

위스콘신 투쟁에 참가한 우체국 노동자들

2월 15일 미국 동북부에 있는 위스콘신 주에서는 공공부문 일자리를 대거 없애고 노동자들의 단체협약권을 무력화하려는 공화당 주지사 스콧 워커의 계획에 반발하는 투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워커는 상황을 오판했다. 비록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노동자 운동은 조용했지만, 경제 위기가 가난한 미국인의 삶을 망치고 공화당이 공공부문을 공격하는 것을 보자 위스콘신 주 노동자들은 행동에 나섰다.

많은 노조는 민주당을 지지하며, 이번 공격도 온갖 문제를 오바마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공화당의 시도라고 믿는다.

이번 투쟁은 교육보조인협회(TAA) 노조가 2월 15일 열리는 주의회 합동 재정위원회 청문회에서 발언할 사람 수천 명을 모집하면서 시작됐다.

절차상 발언자 1인당 발언시간은 2분이다. 애초에 재정위원회는 통상적인 관례에 따라 자정이 넘어 청문회를 휴회할 때까지 계속 발언자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줬다.

그러나 위원회가 휴회를 선언한 뒤에도 노동자와 활동가 들은 청문회를 계속했고, 수백 명이 공공서비스를 지지하는 발언을 이어가면서 의회 건물 점거를 시작했다.

한쪽에서 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 사람들은 음식과 침낭을 준비하고, 언론에 연락하고, 점거에 함께하자고 다른 이를 설득하는 작업을 했다. 실제로, 수천 명이 점거를 도우려고 몰려왔다.

밀워키에 사는 24살의 사회복지사인 폴 골루어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끝까지 여기 있을 겁니다. 스콧 워커는 우리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미국과 전 세계의 이목이 우리에게 쏠리고 있고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의회 점거

미국 전역에서 많은 이가 위스콘신 투쟁에서 자신감을 얻어 시위에 참가했다. 50개 주에서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위스콘신 주정부가 악법 통과를 강행할 경우 파업을 벌이겠다는 계획도 나왔다.

노동자들이 강력한 힘을 보여 주면서 워커의 법안 통과가 지체되고 있다.

만약 이 법이 통과된다면 노동자 봉급에서 자동으로 노동조합비를 징수하는 제도가 중단될 것이다.

또, 노동자들은 의료보험과 연금에 더 많은 돈을 내야 하며, 메디케이드[65세 이하 저소득자와 장애인을 지원하는 국민의료보조 제도]와 저소득 가정의 아동을 위한 의료보험 제도인 베저케어 예산이 삭감될 것이다.

미국 노조 활동가들은 투쟁하는 위스콘신 노동자들에게 연대 메시지를 보냈다.

많은 이가 공격의 규모에 놀라 이번 투쟁에 참가했다.

은퇴한 주 공무원인 도나 도일은 이렇게 말했다. “일단 누군가 다른 이의 권리를 앗아가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는 모든 이의 권리를 앗아갈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위스콘신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저항하고, 반대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은퇴 교사인 잭 다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은 단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나라의 권력자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봉급을 최대한 줄이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일부분이며 죽으나 사나 함께할 것입니다.”

위스콘신 투쟁의 역사

위스콘신은 1930년대와 1950년대 중요한 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1959년 위스콘신 공무원 노동자들은 미국 최초로 주차원의 단체협상권을 따냈다. 1934년 쾰러 사 ― 대형 배관자재 회사 ― 의 파업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당시 미국노총(AFL)은 임금 62.4퍼센트 인상과 노동 시간 25퍼센트 단축을 요구했다. 또, AFL은 자신을 유일한 단체협상자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회사 소유주는 공장을 폐쇄했고 7월 16일 파업이 시작됐다. 용역 깡패들은 최루가스, 총과 몽둥이를 들고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노동자들은 반격을 가했다. 월터 쾰러는 12일 동안 자기 사무실에 갇혀 있었다. 노동자들은 부분적으로 승리했지만, 나중에 노조를 조직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1952년 자동차노동자연합(UAW)은 투표를 통해 모든 쾰러 노동자들을 대변할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허버트 쾰러는 이 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1954년 4월 5일 노동자 3천 명이 파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공장 운영을 중단시켰다.

그 뒤 6년 동안 노동자와 파업 파괴자 들이 공장 출입구에서 싸웠다. 이 투쟁은 1965년에 쾰러 사가 밀린 임금 3백만 달러와 연금 분담금 1백50만 달러를 내기로 합의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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