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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형법 92조 합헌 판결:
동성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반동적 판결

2008년 8월 육군 22사단 보통 군사법원은 동성애를 처벌하도록 한 군형법 92조가 동성애자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헌법재판소는 보수단체들의 반발을 의식하며 무려 2년 반 이상을 끌다가 결국 지난 3월 31일 군형법 92조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렸다.

이것은 “동성애를 형법으로 처벌하는 국내 유일한 법률에 손을 들어준”(차별금지법제정연대 성명) 반동적인 판결이다. 헌법재판소의 우파적인 본질이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군대의 특수성’을 내세워 판결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어떤 ‘특수성’도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 인권을 짓밟으면서까지 보장될 수 있는 가치일 수 없다. 이것은 젊은 남성들을 강제로 징병하고 자연스러운 애정 행위까지 틀어막는 이 체제의 억압상을 보여 준다.

설사 ‘군대의 특수성’을 인정한다 해도, 군대 내 성행위 중에서 유독 동성 간 성행위만 형법의 처벌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백한 이중잣대다.

게다가 합헌 결정에 반대 의견을 낸 세 명의 재판관들이 지적하듯이, 군형법 92조는 당사자 간의 자발적 합의에 의한 성관계인지 폭행과 협박에 의한 성폭력인지 전혀 구별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처벌할 수 있다. 이것은 동성애를 성폭력 같은 범죄와 다를 바 없이 취급하는 것이다.

성폭력을 처벌하는 조항이 군형법에 이미 따로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92조는 더더욱 동성애 자체를 처벌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헌법재판소는 “동성 간의 성적 행위가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고 선량한 도덕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라고 함으로써 동성애에 대한 삐뚤어진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동성애가 비정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잘 그려졌듯이,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동성애가 언제나 차별받았던 것도 아니다. 그리스·로마 시대 때는 성인 남성들이 소년들에게 구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랑의 표현으로 인정됐다. 중국이나 인디언 사회에서도 동성간의 관계를 인정했던 예가 있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지배적이었던 8세기 무렵부터 12세기까지 서유럽에서는 동성관계에 대한 특별한 반발이 나타나지 않았다. 남성 간의 성행위가 다른 성행위보다 특별히 더 벌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동성들 사이에 애정 관계가 흔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자료들도 있다.

동성애가 비정상적인 행위로 여겨지고 체계적으로 억압받게 된 건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동성애’라는 용어 자체도 헝가리 정신의학자인 벤케르트에 의해 1869년에 고안됐다.

보수단체들은 이번 판결을 앞두고 헌법재판소에 몰려 와 “군대 간 내 아들 동성애자 되고 AIDS[에이즈] 걸려 돌아오나” 하고 광분했지만, 다른 사랑의 감정이 그렇듯이 동성애도 감염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는 것도 동성애 혐오자들이 퍼뜨린 거짓말일 뿐이다. 이성 간 성접촉이 에이즈 바이러스의 가장 주요한 전염 방식이다.

보수적 분위기 강화

이번 합헌 결정은 최근 강화되고 있는 동성애 혐오 조장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영화 〈친구 사이?〉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 보수단체들의 〈인생은 아름다워〉 비난 광고 조직과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캠페인, 대형교회가 주최하는 ‘동성애 퇴치 기도회’ 등 동성애에 대한 공격이 최근 몇 년 동안 지속돼 왔다. 이런 우파들의 공세 속에서 법무부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포기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은 이런 우파들의 공세에 힘을 실어 주고,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구실을 할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화되는 것은 사회의 전반적인 억압·통제 강화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우파적인 레이건 정부 하에서 동성애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강화됐는데, 같은 시기에 낙태권 공격, 인종 차별 강화, 노동자 권리 공격 등이 함께 벌어졌다.

지배자들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고통을 전가하고 불만과 저항을 단속하기 위해 더더욱 사회적 약자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보수적 분위기를 강화하려 한다. 최근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마녀사냥, 낙태에 대한 공격, 동성애 혐오 조장 등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체제의 완충장치 구실을 해 주고, 사회가 제공하지 않는 복지를 대신 떠맡아 주고, 노동력을 재생산해 주는 가족이 해체되지 않도록 가족 가치를 적극 옹호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가족에 헌신하라고 강요하고 동성애나 낙태, 싱글맘 등 가족 가치를 옹호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에 적대적이다.

이런 공격은 노동계급이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고통의 원인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하기 때문에 경제 위기 고통전가와 민주적 권리 억압에 맞서 함께 투쟁하는 데서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이 억눌려 지내는 세상은 다른 노동자와 여성 들에게도 해롭다.

따라서 사회 진보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번 군형법 92조 합헌 판결에 반대하고 동성애 차별에 함께 맞서야 한다. 동성애자들은 극도의 억압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운 조건에 있기 때문에 특히나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