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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선거지상주의를 경계한다

바야흐로 대학가에 투쟁의 바람이 불고 있다. 투쟁의 범위, 지속성 등에 비춰볼 때 근 몇 년 간 볼 수 없던 현상이다. 등록금·학생 복지 등의 사안으로 고려대, 이화여대, 서강대, 인하대, 숙명여대, 동국대 등에서 학생들의 점거농성·집회·수업 거부가 이어지고 있고, 서울대에선 법인화를 저지하기 위한 교수·학생·교직원들의 싸움이 한창이며, 홍익대·고려대·고려대병원·이화여대·연세대에서는 청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성공회대에서도 학교측의 일방적인 행정구조 개편에 따른 계약직 행정직원들의 해고 문제가 큰 쟁점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쟁점들은 새롭지 않다. 등록금 투쟁은 산발적이냐 동시다발적이냐, 강력하냐 미약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 십수 년 전부터 매해 반복되는 것이고, 서울대를 필두로 한 국·공립대 법인화 흐름 역시 10년 넘게 이어진 ‘뜨거운 감자’다. 비정규직 문제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투쟁들이 시기적으로 겹쳤다는 사실이 이번 대학가 투쟁을 새롭게 만들었다. 즉 투쟁에 참가한 주체들이 서로를 고무하고 서로의 투쟁을 강화하면서 공동의 적 — 대학과 정부 — 에 크고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물가가 치솟은 상황에서 주요 사립대학들이 줄줄이 등록금을 인상한 게 한몫했다. 새해 벽두에 청소 노동자들을 집단해고한 홍익대는 광범한 연대투쟁에 호되게 당했는데, 이에 고무된 고려대·고려대병원·이화여대·연세대 청소 노동자들은 공동투쟁과 집단교섭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가 학생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들의 탐욕스러움을 또 다른 차원에서 각성시키며 투지를 끌어올렸다. 한편 지난해 12월 한나라당의 날치기로 통과된 서울대 법인화 법안은 마침내 교육공공성을 지키려는 이들의 분노와 절박감을 폭발시켰다.

이런 아래로부터의 저항은 지배층 내 자중지란과 나란히 진행 중이다. 정운찬의 ‘초과이익공유제’ 언급에 이건희는 ‘공산주의 용어냐’고 따졌고, 동남권 신공항 건설 계획 백지화는 친이-친박의 뿌리 깊은 분열을 다시금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당파를 초월한 의원들의 단합이라는 낯익은 광경을 또 연출했다. 구제역 파동과 물가폭등, 방사능 공포 등은 민심의 싹조차 짓이겨버렸다. 이제 이명박 정부를 초지일관 옹호하는 이들은 ‘빨갱이’ 잡는 할아버지들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앞날을 낙관하기는 이르다. 학생들의 투쟁에 ‘투표는 했냐’며 조소하는 대중 때문만이 아니다. 정말로 큰 문제는 진보연하며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민주당이고, 그를 추수하는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세력이다. 그들은 사회 진보의 진정한 동력을 망각하거나 외면한 채 2012년 민주연립정부 수립 계획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민주연립정부 구상의 핵심 전략은 계급연합(민중전선주의)에 기반한 선거연합이다.

진보세력은 부르주아 정당인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위해 강령과 요구 수준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낮추고 거리와 작업장과 대학에서의 투쟁을 단속하게 된다. 실제로 촛불항쟁, 노무현 사망 정국, 미디어법 투쟁, 쌍용차 파업과 KEC 파업 등에서 우려는 현실화했고, 현재진행형인 전북 버스 파업에서도 진보세력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과 연대투쟁 건설에 미온적이다(전북도지사 김완주와 전주시장 송하진은 민주당 소속).

투표는 민심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선출되는 자들은 선출된 이후부터 대중 위에 군림하기 일쑤며, 진정한 권력은 — 대기업 사장, 고위 행정 관료, 경찰·군대 총수, 족벌언론 사주 등 — 선거로 갈아치울 수 없다. 그러므로 진보세력과 개혁적 시민사회단체가 선거에 사활을 거는 것은 진보적 대중의 염원을 실현할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며 선거 전술로서도 적절하지 않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가? 탄핵 반대 대중투쟁이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눈앞에 둔 이 시점, 기층도 상층도 다사다난하고 앞으로 그 양상이 더 또렷해질 것이다. 진보세력과 개혁적 시민사회단체는 급진적 사회 개편의 맹아를 선거공학적 틀 속에 매몰시켜 버리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