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영화 〈적과의 동침〉을 보고
〈노동자 연대〉 구독
평화로운 한 마을에 북한군이 들어오고, 북한군과 주민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의 〈적과의 동침〉 영화 광고를 보고, 혹시나 〈웰컴 투 동막골〉 같은 영화가 아닌가 하는 기대로 영화를 봤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웰컴 투 동막골〉과, 무자비한 북한군에 맞서 싸우던 포항 학도병 이야기를 다룬 〈포화 속으로〉의 중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북한군 한 소대는 마을을 점령하고 "우리 인민해방군은 여러분을 해방시키기 위해 여기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된' 주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고, "노동자의 자기해방"을 뜻하는 사회주의 이념과는 다르게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 행세를 한다.
여기서 나온 주민들은 처음에 "우리가 언제 핍박받고 산 적 있느냐"고 분개했지만, 결국 북한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이 소대는 이 마을에 '반동분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 조국해방을 위해 참전했지만,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압제자인 것을 발견했소"라는 북한 정치장교 '정웅'의 고백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인 북한군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동시에 진보운동의 일부의 '한국전쟁은 조국해방 전쟁'이라는 관점은 한국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서는 연평도 사태 이후 더욱 강화된 북한을 악마화하려는 우파들의 의도가 느껴지기도 한다.
가령, 북한군 소대장(그 역시 반공청년단에 의해 가족들이 죽임을 당한 사연이 있다)은 이 지역에 '반동분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학대하고, 정치 장교인 정웅이 설득하기 전까지 "주민을 학살하라"는 연대의 명령을 끝까지 따르려고 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와 반대로 반공청년단 출신의 택수는 예의가 반듯하고 북한군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한 불쌍한 청년으로 묘사된다.
'백씨'란 사람도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민란때는 반란군이 세면 반란군 편에 붙고, 민란이 진압되면 다시 정부 편에 붙었고", 그 자신도 "일제시대 때는 일제 편을 들었다"가, "해방 후에는 남한 편"에 붙었고, "이제 북한군이 점령했을 때는 북한 편에 붙었으며", "마지막 미군의 진격이 임박했을 때는 다시 남한 편을 들 준비를 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다.
감독이 이 백씨를 통해서 동학농민혁명 등 민란에 대해 우호적인 남한 진보운동과, 제정신은 아니지만 제국주의 국가처럼 남을 침략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북한, 비판받아 마땅한 일본 제국주의를 한통속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다.
또한, 영화에서 김정일 집권 이후에나 많이 쓰이는 '선군정치'란 표어가 북한군 표어로 많이 등장하는 등, 사실관계에서도 틀리기도 했다.
미군들이 주민들을 학살하려는 북한군을 사살하고 주민들을 살린 '해방군'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김동춘 교수나 한홍구 교수 등 여러 한국전쟁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남북한 민중 입장에서는 남한군과 미군, 북한군 그 어느 누구도 자신들을 죽일 수 있었던 자들이었을 뿐이다.
물론 한국 전쟁 중에 북한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근리, 보도연맹 사건 등 "북한 부역자 소탕"을 위한 남한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남한 군인, 북한 군인, 미국 군인과 주민들 사이의 우정을 다룬 〈웰컴 투 동막골〉이란 영화가 나올 정도로 김대중, 노무현 시기에 불안정했던 '남북 협력' 분위기를 감독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 점은 북한군 정치장교 정웅과 마을 유지의 딸 설희의 아버지가 모두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는 것과, 마지막에 북한군 연대장의 마을주민 학살 명령을 정웅과 소대장이 막으려고 한 점에서 알 수 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남한이나 미국, 북한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리비아에서 저지르고 있는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하다 못해 〈웰컴 투 동막골〉 정도의 남북한 화해를 다루는 휴머니즘 영화라도 나오거나, 한국전쟁에 관한 그보다 더 급진적인 반전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