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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를 읽고

‘병역거부’라는 급진적 저항 방식을 통해 내놓는 요구가 왜 ‘대체복무제 도입’뿐인가? 너무 협소한 요구 아닌가? 내가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줄곧 품어왔던 의문이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임재성 지음, 그린비)는 그 의문이 무지의 소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나 같은 이의 무지를 지적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니다. 오히려 병역거부운동의 다양한 문제 의식이 왜 '대체복무제 개선'으로 수렴돼 왔는지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나아가, 병역거부를 징병제 도입과 관철에 맞선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조명하며, 병역거부 운동이 전쟁과 군대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평화운동으로서 발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엉터리 여론조사를 근거로 징벌적 대체복무제 도입조차 백지화해 버린 국방부의 추악함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은이 임재성 역시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지배자들의 악선전을 논파하며 논의의 물꼬를 튼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이미 '대체복무제 선진국'인데, 방위, 전·의경제도, 산업기능요원, 전문연구요원 등 모종의 '대체복무'를 하는 인원이 12만 명을 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병역거부자의 선택항이 될 수 없었다. 어떤 형태의 복무든 4주 간의 기초군사훈련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변종' 대체복무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한국사회에서 대체복무제는 사실상 '무급' 인력인 젊은이들을 권력의 필요에 의해서 사용하고자 시작됐다(68쪽)". 여기에다 매년 1천여 명에 이르는 젊은이가 감옥에 가야만 하는 현실을 개선하라는 요구에 "징병제가 와해될 우려"를 들먹이는 지배자들의 태도를 겹쳐보면, 징병제를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포장하는 게 얼마나 낯간지러운 일인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그러나 몇십 년 동안 한국 대중은 낯뜨거운 일을 낯뜨겁다 말할 수 없었고, 하기 싫은 일을 하기 싫다 말할 수 없었다. "언어가 부재했던 울분(260쪽)" 속에서 대중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자신이 받은 피해와 상처를 남들도 받아야만 한다는 궁색함을 숨긴 채 군 가산점제나 병역거부, 이중국적자, 혹은 연예인 병역과 같은 사안으로 흘러가 계급적 울분과 군 복무에 대한 상처를 폭발시켰다(263쪽)". 이런 상황을 야기한 원인이 국가의 엄청난 폭압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박정희는 주민등록제도 도입, 군 미필 남성의 고용 불법화, 병역거부자 반복·가중처벌 등 전방위적인 압박을 통해 1960년 35퍼센트에 달하던 병역기피율을 1974년 이후 0.1퍼센트 이하로 떨어뜨렸다. 대한민국을 '병영 국가'로 주조해낸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병역이 '도덕'이 된 사회에서, 그리하여 미필자나 기피자나 면제자나 여성을 '이등 시민'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덜떨어진 사회에서, 병역거부자는 그 존재만으로 충격이었다. 군대 대신 감옥을 간다? 그 이유를 기자회견을 통해 떳떳이 밝힌다? 그들의 신념은 각양각색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군대는 살인 집단이자 폭력기구라는 사실을 직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죽여야 하는 '적'은 누가 결정하느냐(188쪽)"고 물을 수 있고, "[적을 죽이기 위한] 비인간화 속에서 이뤄지는 도덕성의 마비, 인간성의 파탄(196쪽)"을 예민하게 느끼며, 자국민 학살과 해외 파병 같은 "가해자로서의 기억(198쪽)"을 떠올릴 수 있다. 남성우월주의적인 군사문화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는 여성운동이나 성소수자 운동과의 중요한 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현재, 전쟁이란 과거사일 뿐이라고 단언할 사람은 거의 없다. 당장 한반도에서만도 남북 간 상호 포격전이 벌어졌고, 전쟁 연습 중이던 군함이 침몰해 4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국군이 파병돼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선 서방 제국주의에 의한 학살과 굶주림과 인권 침해가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혁명이 진행 중인 중동에선 군대가 자신의 진정한 구실을 드러낸 바 있다. 바야흐로 '전쟁과 혁명의 시대'인 이때,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는 군대와 근대 국가의 본질을 폭넓게 이해하고, 병역거부운동이 품고 있는 반전평화주의적·반군국주의적·반군사주의적 의미를 모색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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